권서각(시인·문학박사)

산책길에서 아주머니들이 다정하게 걸으며 나누는 이야기를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되었다. “...글씨를 쓰는데 껄깨이같이 써가주고 먼동 아지도 못하그러...” 스치며 지나갔기에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귀에 쏙 들어오는 낱말이 있었다.

‘껄깨이’라는 말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다. 그 낱말이 귀에 들리는 순간 어린 시절 초가집이 떠오르고 마당가 거름더미 곁에서 엉덩이를 까고 똥을 누던 소년의 모습이 떠올랐다.

‘껄갱이’ 또는 ‘껄깨이’는 회충의 경상도 방언(사투리)이다. 경상도에서는 지역에 따라 ‘거생이’라고도 하고 ‘거시’라고도 한다. ‘껄깨이’라는 말 한마디에 금방 잊었던 어린 시절의 고향마을과 스님처럼 머리를 깎은 동무들과, 위생관념이 없어서 횟배를 앓는 아이들이 많았던 가난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학교에서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회충약을 나누어 주었다. 회충약을 먹은 다음날은 똥을 헤쳐 기생충이 몇 마리 나왔나 세었다. 선생님께 몇 마리 나왔다고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낱말 하나가 추억의 창고를 열게 하고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생산해낸다. 이것이 언어의 힘이다. 오랜만에 우리고장 사투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사투리가 사라지고 있는 시대상을 말해준다. 저간의 학교교육은 표준말은 맞는 말이고 사투리는 틀린 말이라는 인식을 심어준 것이 사실이다. 표준말은 나라를 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 편리하게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정한 말이다.

물론 표준말은 필요하다. 그러나 사투리도 틀린 말은 아니다. 표준말은 여러 지역의 사투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말이다. 사투리가 풍성해야 표준어도 풍성해지고 우리 국어도 풍성해진다. 국어가 풍성해야 우리 문화도 풍성해진다.

주시경 선생은 말이 올라야 나라가 오른다 하셨다. 우리국어의 바탕이 방언이니 방언은 우리가 보존하고 가꾸어야 할 소중한 언어자산이다. 사투리가 사라지는 원인은 여럿이지만 가장 대표적인 요인이 말의 사대주의(事大主義)다.

사대주의는 버려야 할 유산이다. 말의 사대주의란 문화적으로 우수한 지역의 말을 높다고 여기는 생각을 말한다. 사투리보다는 서울말을, 국어보다는 영어를 높은 말이라 여기는 경향이 있다. 가장 좋은 말은 모국어다. 사람의 생각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이 모국어다. 국어 표준말은 서울말을 중심으로 정해졌다. 그래서 서울말은 좋은 말이고 사투리는 촌스런 말이라는 의식이 형성되었다. 말 가운데 가장 듣기 거북한 말이, 사투리에 익숙한 사람이 어색하게 서울말을 따라하는 것이다. 더구나 매체가 발달하여 서울말을 보편적으로 들을 수 있으니 사투리가 사라지는 것에 가속도가 붙는다. 내 친구 면작 선생의 걱정스런 목소리가 들린다. 영주에 영주 말 하는 젊은이가 거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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