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서각(시인·문학박사)

심산의 스승 면우 곽종석은 일찍이 벼슬할 뜻을 접고 거창 다전에서 학문연구에 정진했다. 그의 호 면우(면宇)는 머리를 숙여야 들어가는 집에서 성리학을 하는 이란 뜻이다.

그리하여 그는 조선의 모든 선비들이 우러르는 경지에 다다랐다. 고종의 부름을 받고 입궐하여 종1품의 벼슬을 받았지만 실제 벼슬을 하지는 않았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선비로 면우장을 말하는 것은 회헌-퇴계로 이어지는 조선 성리학의 맥을 이은 분이기 때문이다.

퇴계학파의 학통을 이은 이진상에 배웠으며, 한때 봉화 춘양에 머물면서 퇴계학문을 연구하였다. 주리론(主理論)의 입장에 조선성리학을 집대성했다. 그는 조선말의 대표 선비였다.

기미년 3.1혁명 때 기독교, 불교, 천도교 대표가 민족대표 33인이 되었다. 33인 가운데 선비는 아무도 없었다. 이는 이 땅에 선비정신이 이미 주류에서 밀려났음을 의미한다.

면우는 이를 부끄럽게 여겨 그의 제자 심산과 함께 137명의 선비들의 서명을 받아 파라장서사건을 계획하고 실행했다. 이 일로 투옥되었다가 병으로 풀려났다.

면우가 벼슬을 하지 않거나 의병활동을 하지 않은 것은 그의 어깨에 조선의 성리학이라는 무거운 학문의 짐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면우의 선비정신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이가 심산이다.

면우의 시대가 임금에 간(諫)하여 왕도정치를 실현하는 것이 선비정신의 실현이라면 면우는 그의 선비로서의 소임을 다한 것이다. 심산의 시대는 간할 임금도 나라도 없는 시대였다. 그리하여 그는 민족의 독립이라는 화두를 풀기 위해 이 땅에 ‘유도회’를 만들어 선비정신을 부활하고자 했다.

그런 연유로 면우장이 조선의 마지막 선비라면 심산은 현대의 대표 선비라 할 수 있다. 심산이 세운 유도회가 이승만에 의해 친일파로 채워졌다는 것은 이 땅에 선비의 맥이 끊어졌음을 말해준다. 친일파를 온전한 선비라 할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한국현대의 선비는 심산이 유도회와 성균관대학에서 내쳐지기 전과 후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성리학의 학통과 정신을 제대로 이은 심산이 유도회에서 쫓겨났다는 것은 제대로 된 선비정신의 맥이 끊어졌음을 말해준다.

물론 지금도 각 대학의 유학과와 한문학과에서 유학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고 지역마다 유림이 있어 선비정신을 잇고자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형세는 유학의 정신이 주류에서 멀어진 상황이라는 것이다.

신식 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 조부와 부친으로부터 퇴계 선생, 곽면우장, 심산 선생이란 이름을 자주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그 말씀들이 고리타분하고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신교육 내용과는 달랐기 때문이며 선비정신이란 가치가 주류가 아닌 시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서양의 것만 잘난 것으로 여기며 우리의 소중한 정신자신을 잃을 상황에 이르렀다.

어떤 주의나 시류에도 굴하지 않던 심산의 선비정신, 우리가 회복해야 할 소중한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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