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용호(전 영주교육장·소백산자락길 위원장)

류빈의 묘소 종릉(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47호)

문수면 승문리에는 「종릉(種陵)」이라는 마을이 있다. 일명 「유릉(柳陵)」 또는 「유천(柳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조선조 명신으로 영흥대도호부사를 지낸 류빈(柳濱)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류빈의 묘소 부근을 흘러내리는 개울이 버드내[柳川]여서, 마을이름도 유천이 되었다. 이름 하여 ‘버드랭이’ 마을이다.

버드랭이 마을의 <영주 류빈 묘비 및 석물 일괄>이 2016년 10월 6일 경상북도의 문화재자료 제647호로 지정되었다. 다시 말하면, 류빈의 묘소가 문화재로 지정된 지 1년 됐다는 말이다.

묘소가 문화재로 지정된 예는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문수면 승문리 종릉마을에 있는 류빈의 묘소가 “조선 초기 고관의 독특한 무덤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어 여말선초(麗末鮮初) 이래 사대부가 무덤의 양식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서 학술적 가치가 크다”는 것이 문화재청의 문화재 지정 사유이다.

속칭 유릉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 무덤은 하단부를 화강암으로 6각정석(六角井石)을 3단으로 쌓아 8각 형태로 둘렀다. 이는 왕릉의 격식에 준하는 형태이다.

정면에는 혼유석이 있고, 그 앞에 상석과 향로석이 위치하며, 주가석(酒架石), 촉대석(燭臺石), 축판석(祝板石)까지 완비되어 있어 흔치 않은 무덤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재사(齋舍) 또한 8각기둥의 특이한 양식을 따르고 있다 한다. 이래서 종릉재사는 묘소에 앞서 1993년 2월 25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8호로 지정된 바 있다.

묘주 류빈(1367〜1448)은 전주류씨 영흥공파의 파조이다. 당연히 이 묘는 전주류씨 영흥공파 종중에서 관리한다. 그런데 이 묘소를 영릉(英陵-세종), 홍릉(洪陵-고종), 태릉(泰陵-문정왕후) 등 왕가의 무덤처럼 능(陵)으로 높여 부르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신하의 분묘를 능으로 봉할 수 있는 조례(條例)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나 전국에서 유독, 부산 기장의 <신라승상차공지묘>라는 차릉(車陵)과 문수면 승문리의 <통정대부영흥도호부사유공지묘>라는 종릉(鍾陵), 이렇게 두 곳만이 능으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군주가 아닌 사인의 무덤이 능으로 봉해진 이야기는 조선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태종(이방원)이 어릴 적 동문수학한 ‘정미갑계(丁未甲契)’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방원을 포함한 21인의 동갑계원 중 18명이 조선개국원종공신에 책봉되었다. 태종은 ‘이들의 후손들은 징병과 부역을 면하고, 이들의 묘는 임금과 같이 능으로 하라’고 명했다고 전한다.

이에 따라 세종은 향년 79세로 류빈이 별세하자 국풍(國風-나라의 지관)으로 하여금 전국 명산을 밟게 한 다음,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 아늑한 명당(玉女彈琴形-아름다운 여인이 거문고를 타는 형국)을 찾아 예장하고, 종릉이라는 능호(陵號)까지 하사하는가하면, 영천군수(영주)에게 일러 매년 제사를 올리도록 조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부터 유빈의 무덤은 하사된 ‘종릉’으로 불리어지게 되는 것이다. 당시 관군에 의해 500리 운구되어온 종릉 예장 상여는 그 후 550여 년 간이나 보관되어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상여로 기록되었으나 심한 부식으로 멸실되고, 장식품 일부가 소수박물관에 보관중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류빈은 조선 초 인물로 경주부윤, 영흥대도호부사(함흥)를 지냈다. 지영주사를 지낸 바 있는 하륜(河崙) 영의정의 생질이다. 당시 영흥대도호부에는 상왕인 이성계(李成桂)가 머무르던 곳이기에, 당시 여러 가지 상황으로 미루어 임무가 매우 막중한 지방수령의 자리로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태종은 자신의 오른팔처럼 믿을 수 있는 친구 유빈을 특별히 영흥에 보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막역한 함수관계가 사후의 예우까지 더욱 단단히 다짐해 둔 것으로 해석되기에, 무덤의 호칭을 유릉, 종릉 등으로 아무렇게나 혼용할 게 아니라 세종이 하사한 ‘종릉’으로 단일화해야 한다는 견해에 이른다. 더구나 순종 임금의 무덤이 유릉(裕陵)이어서 발음상으로 혼돈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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