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서각(시인·문학박사)

어떤 행동을 습관적으로 하다보면 그 행동을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 알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런 일 가운데 예식장 가는 일과 장례식장 가는 일이 있다.

우리지역의 길흉사는 옛 상부상조 문화의 전통이 남아 있어 널리 지인들에게 알리기에 길흉사에 다니는 일이 매우 잦은 편이다. 오랜만에 길에서 지인을 만날 때 마땅한 인사말이 없어 “춘부장께서는 잘 계시는가?” 하고 물으면 지인은 낯선 표정을 짓는다.

그 때야 지인의 부친상에 문상 갔던 일이 떠오른다. 선친의 안부를 묻는 인사말에 지인은 아마 매우 생뚱맞다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 생뚱맞은 말이다.

촛불혁명 이전까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치명적인 말이 북한과 관련된 말이다. 대한민국 주류 권력은 반공을 국가이념으로 내세웠다. 그들의 권력을 비판하는 세력에게는 어김없이 용공이라거나 친북이라고 몰아세웠다.

용공, 친북, 좌파, 좌익, 종북, 주사파, 빨갱이 등의 말이 그들이 가장 자주 쓰는 말이었다. 이 말대로 대한민국에서 북한을 옹호하고 적화통일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 대답은 그들도 잘 알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것은 이 말이 가지는 힘 때문이다. 6.25의 비극을 겪은 우리에게 북은 적일 수밖에 없다. 남한에서 가장 무서운 낱말이 북과 관계되는 말이었다.

남한에서 이른바 저항세력은 독재를 비판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청년 학생과 지식인들이었다. 이들에게 권력은 북한 관련 말과 연관시켰다.

남북의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대화를 말해도 좌파라 했다. 북에 가서 6.15 공동선언을 하고 10.4공동선언을 한 디제이와 노무현 정권을 좌파 정권이라 불렀다. 권력이 흔들릴 때마다 간첩사건을 조작하기도 했다. 참으로 대단한 힘을 가진 말이 북과 관련된 말이었다.

촛불혁명 이후 그 권력의 핵심이 탄핵되고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밝혀지고 있다. 그들은 정치보복이라고 하지만 이른바 적폐청산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 적폐라는 것들이 너무나 엄청난 일들이라 놀라울 따름이다. 현 정권에 대한 지지율은 유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높다. 지난 정권의 권력이 저지른 일들이 너무나 참담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늘 입에 달고 살던 종북 좌파라는 말도 이제 그 힘을 잃고 공허한 말이 되고 말았다.

촛불혁명 이후에도 전 대통령의 변호인이나 이른바 친박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아직도 ‘좌파’라는 말을 하긴 한다.

한국당의 어느 국회의원이 국정감사에서 임종석 비서실장에게 청와대를 ‘주사파’가 장악하고 있다고 했다가 ‘그게 질의냐?’는 대답을 들었다. 그 의원의 질의 속에 나온 주사파라는 말도 이제는 참으로 생뚱맞다는 느낌이다. 말의 의미도 시대에 따라 바뀐다. 격세지감을 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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