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탐방[198] 안정면 안심2리 ‘서재골’

서재골 기운 받아 각계각층 지도자 배출
열일곱 아씨들이 겪은 6.25 전쟁 이야기

서재골 전경
안심2리 서재골

안정면 서재골 가는 길
서재골은 백두대간 비로봉, 연화봉, 도솔봉 물이 남원천으로 모여 서천으로 빠져나가는 수구머리에 있는 마을이다. 안정면사무소에서 풍기방향 1km 지점 삼성주유소에서 동쪽방향으로 보면, 안심교 건너 야산아래 옹기종기 자리잡은 마을이 안심2리 서재골이다.

지난달 23일 서재골에 갔다. 이날 바깥서재골에 있는 경로당에서 안효상 이장, 권순이 노인회부회장, 송정선 할머니, 진교순 할머니 그리고 여러 사람들을 만나 서재골의 유래와 전설을 듣고 왔다.

안심터널
옛 서재터

역사 속의 서재골
안심리 지역은 삼국시대 때부터 풍기에 붙어있었다. 풍기는 삼국 때는 기목진(基木鎭)이라 불렀고, 고려 때는 기주(基州), 조선 초에는 기천(基川)이라 했다.

풍기의 내력을 살펴보면 1414년 세종대왕의 아들 문종(李珦)이 태어나 태(胎)를 기천현(풍기) 은풍리 명봉산에 묻었다. 문종이 커서 1450년 왕위에 오르자 그 보상으로 은풍의 풍(豊)자와 기천의 기(基)자를 따 풍기(豊基)라 하고 군(郡)으로 승격됐다.

조선 중기(1800년경) 무렵 군(郡)의 행정구역을 면리(面里)로 정비할 때 안심리 지역은 풍기군 동촌면(東村面) 안심산리(安心山里)가 되었다가 조선 말 1896년(고종33)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풍기군 동촌면 안심동(安心洞)이 됐다. 그 후 1914년 일제(日帝)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영주군 안정면 안심2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재저수지

지명유래
서재(書齋)를 사전에 찾아보면 ‘개인이 사사로이 한문을 가르치는 곳을 이르던 말’이라고 되어 있다. ‘그럼 안심리 서재(서당)는 언제 누가 세웠을까?’ 궁금하다. 1984년에 발간된 경북지명유래총람에 보면 「200년 전 안경상(安庚商)이란 선비가 무성한 다래 덩굴이 덮힌 곳을 개척하여 서재를 짓고 학동들을 가르쳤다 하여 서재골(書齋谷)라 부른다」고 기록했다.

안효상(66) 이장은 “서재골의 내력은 구전으로만 전해올 뿐 문헌 기록은 없다”며 “저는 순흥안씨 서파공파 29세손이다. 통정대부행부호군(通政大夫行副護軍)을 지내신 저의 6대조 정설(廷卨,癸亥1803-甲申1884) 할아버지께서 서재골에 입향(1820년경)하신 기록이 가첩(家牒)에 수록되어 있으나 서재에 대한 기록은 없다”고 말했다.

송정선 할머니와 서재골 안쪽까지 가서 안효상 이장 집 앞에 도착했다.

송 할머니는 “이곳에 큰 바위가 7개 있어 칠성(七星) 바위라 불렀다”면서 “사람은 누구나 칠성의 기운을 받아서 태어난다 할 정도로 옛 선현들은 칠성을 신성시 했다”고 말했다.

기자의 짐작으로도 안심리 서재(書齋)는 칠성바위 가운데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재골 건널목

 

서재골 경로당

서재골 순흥안씨
서재골의 순흥안씨(시조 安子美)는 서파(西坡) 안리(安理)의 후손들로 서파공파(西坡公派)라 부른다. 입향조 정설(廷卨)이 200여 년 전 대룡산에서 분가하여 이곳에 와 숲을 개척하여 마을을 이루고, 서재를 지어 학동들을 가르쳤다고 하니 서재골은 선비의 고장에 걸맞는 지명이다.

순흥안씨 서재골문중은 23세 정설에서 비롯되어-그의 아들 병량(秉良)-겸연(謙淵)-상호(尙鎬)-승원-두찬-효상(29세)으로 세계를 잇고 있다.

순이 아씨 시집가던 날
권순이(88) 할머니를 ‘면장댁’이라 부른다. 남편 안승모(고인) 씨가 안정면장을 지냈기 붙여진 택호다. 감천면 홍고개에서 태어난 순이 아씨는 17살 때 서재골 순흥안씨 가문으로 시집왔다. 섣달 초사흗날 아침 새벽같이 혼례를 치루고 홍고개를 출발했다. 60리 길을 가야하기 때문이다.

신부는 가마타고 신랑은 가마 뒤를 따랐다. 그 뒤로 요객(繞客) 오신 시삼촌과 예물 짐꾼, 가마꾼 등 11명이 뒤를 따랐다. 가마는 석송령-히티재-생현을 거쳐 서재골에 도착하니 이미 날이 저물었다. 아씨는 얼마나 피곤했던지 시부모님께 폐백을 드리고 방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지고 말았다. 아씨는 “아침에 시아버님께서 ‘우리애기 들어오는 날 이렇게 눈이 많이 왔으니 부자될 징조로다’라는 소리에 잠이 깼다”고 말했다. 눈틈으로 밖을 보니 처마 밑에 눈이 두어자 가량 쌓였다.

송정선 할머니의 6.25 이야기
송정선(88) 할머니는 야성송씨로 광시에서 서제골로 시집왔다. 열일곱 새색씨는 “밤에 뒷깐 가는 게 제일 무서웠다”며 “신랑(안두영,1929년생)이 신문지에 불을 붙여 들고 따라왔다”고 했다. 1949년 신랑이 옥대초 교사로 발령받아 학교근처 초가집 외양간 옆에 방을 얻어 신혼살림을 차렸다. 그런데 이듬해 6.25가 일어나 남편이 먼저 피난을 떠나는 바람에 이산가족이 됐다.

며칠 후 안동 일직에서 남편을 만나 인민군보다 한발 앞서 남으로남으로 내려갔다. 부산 영도다리 근처 움막에서 피난생활을 하다가 인천상륙 후 국군 뒤를 따라 북진하여 가을 어느날 서재골에 도착했다.

진교순 할머니 서재골 65년
진교순(87) 할머니는 23살 때 충주서 서제골로 시집와 65년을 살았다. 진 할머니는 “6.25 후 보릿고개를 넘어야 했던 그 시절을 서재골도 피해가지는 못했다”면서 “오랜 세월 늘 함께 했던 면장댁(권순희씨)·조합장댁(송정선씨)은 친동기 이상 따뜻한 이웃이었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또 “아들만 셋이라 딸 많은 집이 부러울 때도 있지만 우리 아들 셋은 든든한 울타리”라며 “우리 마을 젊은이들은 공부 잘 해서 효도하고, 좋은 직장 들어가 효도한다”고 말했다.

신행길 삐시꾸(B29) 폭격에 놀라
정두굴(86) 할머니의 6.25 이야기다. 1950년 여름 열여덟 옥동아가씨가 개포로 시집갔다.

정 할머니는 “길이 멀어 일찍 혼례를 치루고, 가마가 신작로를 가고 있을 때 ‘쎄엑-쎄엑’ 비행기소리가 나더니 ‘쎄앵-콰광!’ 소리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한참만에 정신을 차리고는 가마 밖을 내다봤다. 아무도 없고 나 혼자만 가마에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이어 “신행 후 3일만에 신랑이 떡고리를 짊어지고 친정길에 올랐다. 고갯마루에 이르렀을 때 북한군이 총을 들이대며 ‘이게 뭐냐?’고 다구쳤다. 떡고리를 풀어 보고는 떡을 손수건에 싸가지고 가면서 ‘잘 가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갔다”고 했다.

가마길 100리길
장일남(83) 할머니는 17살 때 예안에서 대룡산으로 출가하여 38세 때 서재골로 이사 왔다. 장 할머니는 “가마길이 100리나 되어 일찍 예안을 출발했다. 가마는 타다 걷다를 반복하며 옹천-성곡-여륵을 거쳐 대룡산에 도착하니 밤이 됐다”며 “그 후 8년동안 태기가 없어 걱정했는데 9년만에 첫아들을 낳고 내리 5형제를 낳았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1남은 대학교수로, 2남은 경찰간부, 3남은 현대자동차, 4남은 롯데칠성, 5남은 해민병원에 있다”고 자랑했다.

트럭타고 단양에서 서재골로
우귀남(80) 할머니는 단양서 트럭타고 서재골로 시집왔다고 한다. 우 할머니는 “당시는 돌다리를 건너 마을로 들어왔다”면서 “예전에는 하루종일 물긷는 일이 제일 큰일이었고, 빨래는 연못에서 했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또 “남편은 봉현에서 한의원을 했는데 66세에 저세상으로 갔다”며 “58세에 혼자되어 이웃 도움으로 아들 셋 잘 키우고, 마을사람들의 울력으로 잘 살고 있다”고 말했다.

서재골은 공부기운 받은마을
정순희(76) 씨는 영일정씨로 이산면 수구리가 고향이다. 독바우로 시집와 살다가 살기좋은 마을을 찾아 서제골로 이사 왔다고 한다. 장진복 노인회장님과 부부간이다. 두 부부는 “저희는 아들 하나뿐”이라며 “아들은 대영중, 대구고를 졸업하고 서울로 진학하여 경제학을 전공했다. CPA 회계사 출신으로 삼정회계법인(삼정KPMG)에 소속됐다. 현재 몽골에 파견되어 아시아 경제발전전략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영자(62) 부녀회장은 “서재골 사람들은 서재(書齋)의 기(氣)를 받아서 그런지 교육열이 매우 높다”며 “부모님은 자식 뒷바라지에 정성을 다하고, 자식들은 열심히 공부하여 서울대학 등 좋은학교에 많이 진학했다. 그래서 교수, 회계사, 기업인, 경찰간부 등 각계각층 지도자를 많이 배출했다”고 말했다.

서재골 경로회관
서재골 사람들
안효상 이장
장진복 노인회장
박영자 부녀회장
권순이 노인회부회장
송정선 할머니

 

진교순 할머니

 

정두굴 할머니

 

장일남 할머니

 

우귀남 할머니

 

정순희 씨

 

이원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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