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자미 시인

구두주걱-이희섭

아침이면 구두의 하루를 퍼 담는다
태양이 자신의 그림자를 떠먹느라 분주할 때
잘 뜸 들여진 걸음 한 그릇을 퍼내
또 다른 하루를 벌어 와야 한다
간 곳마다 한 숟갈씩 꺼내먹는 걸음
나무들은 땅속에 맨발을 묻고 있는 줄 알았는데
흙으로 된 구두를 신고 가을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꺽이는 일에 익숙해진 뒤꿈치를 따라
지나온 길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설익은 발자국소리가 스스로 깊어진다
뒤태가 구겨진 세상 속으로
하루가 서쪽하늘에 붉은 발자국을 남길 때
허기진 골목길부터 어두워지고
숨을 곳이 필요한 발들,
갈 곳 잃은 발들을 불러 모아
소주잔을 꺾는다
차갑게 식은 걸음 한 덩이를 남기고
집으로 돌아와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구두 속
비워진 걸음 대신 어둠이 채워지고 있다
맨발의 아침을 퍼 담으려고 구두주걱이
밤새 구두 곁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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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 벗어 둔 신발을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방으로 들어 온 나를 충직하게 기다리고 있는 신발, 하루 종일 나를 데리고 다녔던 신발이 내가 어디를 가든지 군말없이 따라 나서겠다는 듯 현관을 지키고 있습니다. 함께 사는 식구들의 식성이 닮아가듯 나의 습성을 그대로 익혀 뒤굽부터 닳아진 모습. 그런데 시인의 시선은 신발장 한켠에서 그 구두를 기다리는 구두주걱에 가 닿아 있습니다. 시인의 혜안이 빛납니다. 시인은 모름지기 사물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한 걸음 앞서 시대를 예견하는 지혜의 눈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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