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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호의 문화 확대경[191] 길 3개를 만든 효자, 삼로공

기사승인 [708호] 2019.03.20  15:4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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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용호(전 영주교육장·소백산자락길 위원장)

봉화읍 문단리 요산(腰山)동산 앞 옛 주유소자리 귀퉁이에는 「효자관찰사김이음지려」라고 쓰인 안내판이 서 있다. 안내판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뒤편 야트막한 언덕배기를 50m가량 오르면 넓지 않은 꼭대기를 모두 차지한 정려각(旌閭閣) 하나를 찾을 수 있다. 『孝子觀察使金爾音之閭』라고 새겨진 비석을 끌어안은 조그마한 정려각이다. 강원관찰사를 역임한 김이음(金爾音)은 삼로공(三路公)으로 불린다.

삼로공 김이음은 고려 공민왕 23년(1374)에 문과에 급제하여 조선 태조 때 가선대부호조참판(嘉善大夫戶曹參判), 진주목사(晋州牧使)를 거쳐 강원관찰사(江原觀察使) 때 선정을 베풀어 명관록(名官錄)에 오른 인물이다.

김이음은 천성이 너그럽고 재질이 뛰어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부친이 병환에 들자 관직을 사직하고 장기간 시병(侍病)에도 성심을 다하였다한다. 대소변이 모양과 색깔이 다를 때는 친히 맛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있고, 병세가 더욱 악화되면서 한 겨울에 복숭아를 먹고 싶다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하늘에 기도하니 천도복숭아가 흰 눈 위에 떨어져 이것으로 병을 쾌유시켰다는 흔치않은 효성이야기까지 전한다.

부친이 돌아가시자 3년간 묘 옆에 여막을 치고 여묘(廬墓)생활을 하면서 냉방에 거적자리로 3년 동안 옷 한번 갈아입지 않고 세수도 하지 않은 채로 죽과 소금으로 연명하면서 오직 슬픔에만 잠겨 있었으며 집이 있는 곳을 향해 보지도 않았을 정도로 효성을 다했던 것으로 전한다.

3년상이 끝난 뒤에도 하루 4번씩 성묘했는데, 산중 길을 새벽, 한낮, 저녁, 한밤중에 성묘하고 다니느라, 발자국으로 난 길 하나에 지팡이자국 양쪽 길을 합하여 모두 3개의 길이 생겨 날 정도여서 사람들이 삼로(三路) 선생이라 불렀고, 사림(士林)에서는 ‘효자 삼로 선생’에 대한 행적을 나라에 상소함으로써 태종 16년(1416)에 정려가 내려지고 모든 사람에게 귀감을 삼고자 『여지승람(輿地勝覽)』에 기재하였다 한다.

조선 철종 때 당시 영주고을 서편 땅이던 은풍 상리 도효자의 효행이 『명심보감(明心寶鑑)』 효행편에 실려 있어 크게 귀감이 되고 있으니 이 또한 같은 영주고을 동편 땅 삼로공의 효행이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닐지?

김이음의 사후, 1650년(효종 1) 지방유림의 공의로 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한 서원이 세워졌는데 이 서원이 삼봉서원(三峯書院)이다. 삼봉서원은 창건 당시 명륜당(明倫堂), 박약재(博約齋), 수양재(修養齋) 등의 건물을 잘 갖추었으며, 뒤에 이해(李瀣)·김개국(金盖國)·김륭(金隆)을 추가로 배향하면서 서원의 역할을 다하였으나, 어느 해인지 소실되고 말았다. 그 후 후손들과 지역의 사림이 강당만을 새롭게 건립하여 서원의 명맥을 이어오다가 지금은 그마저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신암리 ‘삼봉골’은 400여 년 전 「삼봉서원」을 건립하면서 자연스럽게 불리어지던 이름이었다. 삼봉서원이 무너지면서 남은 현판은 연암김씨 만취당 종중에서 관리하다가 지금은 한국국학진흥원에 위탁 보관되어 있다.

삼로공을 삼봉서원에 배향하고, 효자비(碑)는 다니는 길목에 세워져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큰길(도로)을 닦는다고 옮기라고 하여 봉화읍 문단2리 요산동산 부근에 옮겨 세웠다. 이후에도 철도개설 및 도로확장, 제방공사 등으로 인해 약간씩 움직임이 있었다가 현재는 요산동산 꼭대기를 차지하여 안전하게 이건 되었다. 그의 묘는 도촌리 화천 만운동(滿雲洞)에 있다.

삼로공 김이음(?~1409)의 본관은 함창(咸昌)이며, 감찰어사 김균(金鈞)의 후손으로 정용랑장(精勇郞將) 김중서(金重瑞) 대에 이르러 영주 동쪽, 현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로 이주한 것으로 되어있다. 현재 도촌2리 만운(晩雲)과 적덕2리 건정에 그의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다. 이른바 삼로공파가 형성된 것인데 김이음의 학문을 이어받아 시(詩), 문(文), 서(書)에 우뚝한 거유로 추앙 받으며 정려비각 건너편 봉화읍 적덕리 두릉골에다 두릉서당(杜稜書堂)을 지어 충과 효와 학문의 본거지를 삼으며 선비의 지조를 지킨 물암(勿巖) 김융(金隆)은 그의 6세손이다.

영주시민신문 okh7303@yj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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