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용호(전 영주교육장·소백산자락길 위원장)

소수서원의 학자수

소수서원(紹修書院)을 들어서기 위해서는 장엄하게 펼쳐진 솔숲의 도열을 통과해야 한다. 그러는 동안 자신을 검색당해야 한다. 솔숲이 서원을 철저하게 경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함부로 정체를 노출시키는 그런 헤픈 서원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솔숲으로 촘촘히 감추어진 오솔길을 통과하는 동안 어느 정도 맘이 정리되면 정문과 마주하도록 기획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른바 고상한 진입공간에 해당한다. 진입영역 전 구간을 차지한 소나무는 그냥 키만 커다란 그런 꺽다리 소나무가 아니다. 특히 재질이 우량하다는 ‘춘양목(금강송)’인 것이다. 춘양목 수백 그루로 이루어진 낙락장송의 열병식은 자못 장엄하기까지 하다. 이런 절차가 모두 끝난 다음에야 소수서원의 정문인 지도문(志道門)으로 안내되도록 솔숲은 세심하게 설계되어 있다.

유럽문화를 「오크 문화」, 지중해문화를 「올리브 문화」라고 한다면, 한국의 문화는 「소나무 문화」라고 할 수 있는데, 소나무는 나무 중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수리’라고 부르다가 ‘술’로 압축되었고, 오늘날 ‘솔’이 되었다고 한다.

소수서원 입구에 2㏊ 남짓 마련된 ‘솔숲’의 수령은 무려 400년을 훌쩍 넘긴다. 400년이 넘는 적송 수백 그루로 이루어진 이 진입공간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뒤가 허한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서원 건립 초기 1000여 그루 심은 것이 500그루 살아남았다는 기록이 있다. 

근래의 한 조사에는 870여 그루로 보고되어 있다. 이른바 장대한 학교 숲인 것이다. 당초 어떤 회유와 시련에도 변함없이 초심을 유지하라는 뜻으로 계절 변화가 없는 소나무를 심어 교육의 표상으로 삼았다고 한다.

처음 식재될 때부터 ‘이 나무의 기상을 닮아 학자의 길을 가라’는 뜻을 담아 아예 ‘학자수(學者樹)’로 명명했단다. ‘겨울을 이겨내는 소나무처럼 인생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참선비가 되라’는 의미로 ‘세한송(歲寒松)’이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권돈인이 순흥 유배시절 이곳 학자수 그림을 그려 추사 김정희에게 보냈다. 그것이 추사 『세한도(歲寒圖)』의 영감이 되었다고 한다. 

세한도에는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也(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라고 하여 ‘세상이 어려워진 뒤에야 참선비의 진면목이 드러난다’는 얼음알 같이 차가운 교훈이 담겨있다고 한다. 게다가 소나무는 영리하기까지 하단다. 소나무꽃[松花]은 암·수가 같은 나무에 핀다. 

남매끼리의 수정은 자손의 형질을 좋지 않게 한다는 소문을 소나무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암꽃은 꼭대기 근처에, 수꽃은 아래 나뭇가지에 피도록 했다. 꽃가루가 날아 위로 올라갈 일은 거의 없으니 남매 수정을 일차적으로 차단한 셈이 된다.

소나무는 햇빛만 풍족하면 다른 것은 별로 개의치 않는다. 돌무더기나 바위틈에서도 자라는 강인한 생명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또한 장엄한 모습으로 눈보라 치는 역경 속에서도 늘 푸른 모습을 잃지 않는다. 

이처럼 소나무는 척박한 환경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끈기의 나무이기에 언제나 학문을 쫓는 학동들의 교훈이 되어왔다. 게다가 정중·엄숙하고, 과묵·고결하며, 기교가 없고 고요한 까닭에 우리 민족의 심성도 같이 대변하고 있다. 수년 전 산림청이 조사한 가장 좋아하는 나무 1위가 소나무(46%)였다. 2위 은행나무(8%)와는 큰 격차를 보였다. 그래서 저렇게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인가. 하늘을 향해 쭉 뻗은 모습에 속이 다 후련하다.

소나무는 한 번 베어 버리면 다시 움이 나지 않는 특성도 가지고 있다. 구차하게 살지 않겠다는 결심이다. 이런 점에서 소나무는 곧은 절개와 굳은 의지를 나타내는 표상이 되어있다. 또한 솔숲을 불어오는 바람을 따로 송뢰(松뢰)라고 하는데, 이 바람이 폐부로 스며들면 온몸이 상쾌해져 정신이 소쇄(掃灑)되는 듯 영혼을 일깨워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필수 각성제 역할이 된다. 소나무의 이런 성정이 유교 문화에 이입된 것으로 보인다.

은행나무 뒤에서 서원 입구를 지키는 왼편 낮은 둔덕을 소혼대(消魂臺)라 부른다. 유생들이 머리를 식히던 쉼터이기도 했고, 손님을 배웅하며 석별의 정을 나누는 곳이기도 했다. 빽빽이 들어찬 수백 그루가 유생들과 그 정을 함께했다. 동고동락하며 수백 년을 지켜온 낙락장송이어서인지 흡사 서원을 향해 경배하는 듯도 하고, 강학당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담장 안으로 허리를 잔뜩 구부리고 있다. 

400여 년 동안이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자랐으니 오죽하랴. 소수서원 소나무의 품위는 웬만한 선비 이상의 기개를 가졌다. 바탕과 성품이 기품으로 가득하다. 우람하고 거대하여 남성적이다. 이런 기품을 가진 나무들 덕에 무려 4천00여명의 유생들이 배출될 수 있었지 않았을까?

소나무는 선비정신과 아주 닮아 있다. 소나무는 철저하게 이기적인 존재다. 선비도 철저하게 이기적인 존재이다. 철저한 이기적 삶이 곧 다른 사람의 삶에 표상이 된다. 꼿꼿한 선비정신이 그렇다. 

선비정신을 가장 잘 드러낸 것이 북송시대 범중엄(范仲淹)의 『악양루기(岳陽樓記)』라고 하는데, 그는 이 작품 마지막 구절에서, 「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歟(선천하지우이우 후천하지락이락여)」라고 썼다. 즉 ‘천하의 근심은 누구보다도 먼저 하고, 천하의 즐거움은 남들이 다한 뒤에 한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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