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탐방[246] 평은면 지곡2리 서당골·삼밭골마을

삼밭골 전경

옛 서당학풍 이어받아 각계각급 지도자 배출
덤바우의 전설, 어르신 잘 모시는 효(孝)마을

평은면 지곡2리 가는 길
서당골과 삼밭골이 있는 평은면 지곡2리는 영주시 최남단으로 안동시 북후면·녹전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영주 적서교차로에서 경북대로를 타고 안동방향으로 향한다. 평은면 오운1리 오동마을을 지나 지곡교차로에서 녹전·지곡2리 방향으로 좌회전하여 700m쯤 올라가면 서당골이 나온다. 마을은 텃골-새장골-삼밭골로 이어진다. 지난달 29일 지곡2리에 갔다. 이날 새장골에 있는 마을회관에서 강대우 이장, 오춘석 노인회장, 김지일 총무, 이우홍 주손 그리고 여러 마을 사람들을 만나 마을의 역사와 전설을 듣고 왔다.

새장골 전경

역사 속의 지곡2리
영주는 조선조 태종13년(1413) 경상도 영천군(榮川郡)이 됐다. 지곡리 지역은 1600년경 군(郡)의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영천군(榮川郡) 천상면(川上面)에 속했다. 당시 행정구역에 서당동과 마전동의 기록이 없는 것으로 봐서 조선 중기까지는 사람이 살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1896년(고종33) 조선말 행정구역 개편 때 서당동(書堂洞)과 마전동(麻田洞)이 행정구역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봐서 이 지역은 1800년 이후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영천군의 천상면과 진혈면(辰穴面)을 통합하여 ‘평은면’이라 하고, 천상면의 마전동과 서당동, 안동군 북후면의 일부를 편입하여 지곡리(芝谷里)로 통폐합했다.

그 후 지신동 지역을 지곡1리, 서당동과 마전동 지역을 지곡2리로 분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강대우(60) 이장은 “지곡2리는 새마-서당골-텃골-새장골-삼밭골로 이어지는 산마을로 마와 고추를 주로 생산하는 농촌마을”이라며 “새마·서당골·텃골에 17가구, 새장골에 23가구, 삼밭골에 20가구 등 60가구에 100여명이 산다”고 말했다.

지명유래
이 지역이 지곡리(芝谷里)가 된 것은 마을 앞을 흐르는 개울가에 지초(芝草)가 무성하여 지초 지(芝)자에 골 곡(谷)자를 써 지곡리가 됐다고 한다.

서당동은 조선 후기 무렵 진성이씨 일족이 이곳에 정착하여 서당을 짓고 아동 훈학(訓學)을 하던 곳이라 하여 이곳 선비들이 서당동(書堂洞)이라고 이름 지었다. 또 마을회관이 있는 마을을 ‘새장골’이라 부른다. 1800년경 경주이씨가 이곳에 정착하여 살았는데 냇가의 모래가 희고 깨끗하여 모래 사(沙)자 사장골(沙場谷)이라 불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발음이 변해 ‘새장골’이 됐다고 한다. 삼밭골 김철규(59) 씨는 “삼밭골은 예전에 김영김씨와 안동권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며 “이 때 대마(大麻)을 많이 재배하여 베를 짜는 집이 많아 삼 마(麻)자에 밭 전(田)자를 써 ‘마전(麻田)’이라 쓰고, ‘삼밭골’이라 불렀다”고 말했다.

예전 과거시험지

진성이씨家 서당(書堂)
서당이란 예전에 민가에서 아이들을 모아놓고 사사로이 한문을 가르치는 곳을 말한다. 서당골의 진성이씨(시조:碩)는 연곡파(淵谷派) 파조 연암공(淵庵公) 정수(庭樹,10세조)의 후손들이다. 서당골에 사는 이우홍(72.진성인) 연곡파 주손은 “저의 선대는 안동 북후 연곡리에 살았는데 6대조 우춘(遇春,1810년生) 선조께서 이곳으로 이거하셨고, 5대조 진규(鎭奎,1833生) 선조 때부터 서당을 세워 학동(學童)들을 가르쳤다는 이야기를 조부(永世,1903生)께서 말씀하셨다”며 “고조부(면주,1857生)께서 진사시에 응시하여 3위로 입상한 당시 시험지(답지)를 가보로 보존하고 있다. 그 때 여기서 글 배운 사람들이 지역사회 지도자로 많이 진출했다.

현재(옛서당) 건물은 70년 전(1949) 조부께서 춘양목으로 지은 집”이라고 말했다. 진성이씨가 이곳에 세거한 것은 1850년경으로 짐작되며, 옛 서당(이우홍家)에는 선조들이 남긴 전적(典籍)들이 상당수 남아 있다. 진성이씨 서당골 후손들은 선대의 높은 학문을 이어받아 한의사, 학교장, 공무원 등 각계각층 지도자를 많이 배출했다.

해주오씨 입향 내력
해주오씨(시조:仁裕)가 서당골에 정착한 것은 25세 수근(守根,1846生)에서 비롯됐다. 오춘석(80,28세손) 후손은 “저의 선대는 안동 수동리에서 사셨는데 수근 할아버지께서 반촌(班村)을 물색하다 이곳에 ‘강 진사’라는 저명한 선비가 살고 있어 1870년경 이곳에 정착하게 됐다”며 “이 후 배움을 원하는 학동들을 모아 한학을 가르치는 등 기초한문교육(천자문, 명심보감 등)에 힘쓰셨다는 이야기를 선친(世친,1921生)께 들었다”고 말했다.

오 후손은 또 “수근 증조부에 이어 두섭(斗燮,1891生) 조부님까지 서당을 운영하셨다”며 “선대의 서당 학풍을 이어받아 후손들이 학업에 정진(精進)하여 29세 시택(時澤)은 서울대를 나와 성균관대 교직원으로 재직 중이며, 30세 민식(民植)은 카이스트 출신 융합공학자, 소영은 서울대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재학중, 재종손 오기훈은 공인회계사”라고 말했다.

덤바우의 전설

덤바우의 전설
새장골 마을 뒤에 덤바우가 있다. 집채만한 바윗돌이 여러 겹 쌓여있다. 오춘석 노인회장은 “덤바우란 바윗돌이 층층 쌓여 있는 것”이라며 “이 바우에 소원을 빌면 모두 들어준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고 했다.

김무인(82) 할머니는 “예전에 아이를 덤바우에 팔면 명(命)이 길다 하여 방구에 촛불을 켜고 비는 사람들이 많았다”며 “덤바우는 자식 잘되기를 비는 어머니의 기도처로 아주 신령한 곳”이라고 말했다. 이 마을 이우홍 씨는“자식 잘 되기를 기원하는 어머니의 기도가 자식들의 효행으로 이어져 어버이를 지극정성으로 모시는 효자효부가 많다”며 “우리마을 

母. 김분일·子. 이성충

(59)·이옥분(56) 부부는 그 어머니(김분일.84)에 대한 효행이 원근에 널리 알려져 효자효부상을 받기도 했다”고 말했다.

산두솔숲(옛 소풍지)
김현남 씨

솔숲이 아름다운 산두마을
새장골에서 삼밭골 방향으로 150m쯤 가다가 우측 산길로 500여m 올라가면 보름달 속 같은 작은 마을이 있다. 옛 사람들은 말 두(斗)자 형상이라 하여 산두(山斗)라 했다한다. 밖에서는 마을이 보이지 않고 안은 넓어 피난처로 딱 좋은 곳이다.

이 마을에 이동조(73,고성인)·김현남(69) 씨 부부가 산다. 이 씨는 “서울에 살다가 4살 때 6.25가 일어나 이곳으로 피난왔다”면서 “당시 부모님은 서울 모(배재고로 추정) 고등학교에서 부부교사로 근무하시다가 난리통에 몸을 피한 곳이 이곳 산두였다. 전쟁이 끝난 후 부모님은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쳤으니 이곳 또한 서당이 되었다”고 말했다. 오춘석 노인회장은 “이동조 씨는 안동고 출신으로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활동을 많이 했다”며 “이동조 씨의 아들 이인형(李寅衡.45)은 서울대 대학원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은 ‘은나노 물리화학자’”라고 말했다.

이순자, 손순하, 정순자, 박기 씨
강필희, 김종순, 김남해, 최점남 씨
지곡2리 사람들
옛 서당의 모습
효도관광

지곡2리 사람들
지곡2리는 4개 마을로 산재(散在)해 있지만 어르신들은 새장골 회관으로 모여 쉼과 친교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김지일(72) 노인회 총무는 노인회 관광사진을 보여주면서 “우리마을은 마을 전체가 단합하여 관광을 떠나기도 하고, 어르신 제주도 효도관광을 다녀오는 등 화합하고 효도하는 마을”이라며 “평소에는 회관에 모여 건강체조를 하고 점심을 함께 먹으면서 정나누기를 한다”고 말했다. 연세가 제일 높으신 장순희(91) 할머니는 “보릿고개를 넘으면서 어렵게 살면서도 자식들 4남매 모두 대학까지 시켰다”며 “디딜방아 찧고 도랑에서 빨래하던 옛날이 꿈같이 지나갔다”고 말했다.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이 마을에 와 살게 됐다는 권점용(82) 어르신은 “예전에 길은 지겟길 밖에 없었고, 1970년대 리어카와 자전거가 나왔다”며 “1980년대 후반 마을길이 확장·포장되었으니 이곳은 산골 오지마을이었다”고 말했다.

서당골 이순자(79) 씨는 “1980년대 마을로 들어오는 길은 경운기가 겨우 다니는 좁은 길이었다”며 “우리 아들(시택)이 대학생일 때(1982년) 서울대학교 농촌봉사단이 우리마을에 와서 웅덩이를 메우고 길을 닦는 봉사활동을 했다. 당시 영주경찰서장이 이 소식을 듣고는 경찰서 트럭을 보내 학생들을 도와주었다”고 했다.

봉화 달실에서 서당골 해주오씨家로 시집왔다는 권영희(82) 할머니는 “새댁시절 물을 여다 밥해먹고 거렁에 나가 빨래하는 일이 중요한 일과였지만 지금은 좋은 세상, 편리한 세상을 만나 노후가 편안하다”며 “강대우 이장님과 오춘석 노인회장님이 마을을 잘 이끌어 주시고, 김지일 총무님과 부녀회원들이 노인들을 위해 마음을 많이 써 주어서 고맙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강 이장은 “옛 서당의 학풍이 앞으로도 잘 이어져 훌륭한 인재들이 더 많이 배출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강대우 이장
오춘석 노인회장
김지일 총무
이우홍 씨
김철규 씨
장순희 할머니
권점용 어르신
권영희 할머니
김무인 할머니
이동조 씨

 

이원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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