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봉(작가)

<삽화 : 이청초>

7,80년대 들어 조금 먹고 살만해지면서 스탠다드 팝, 록, 발라드 등 서양풍의 노래들이 우리 대중가요의 중심에 자리 잡았다. 『내일은 미스트롯』은 변방으로 밀려나버린 전통가요 트로트의 중흥을 이끌 차세대 스타들을 발굴한다는 취지에서 기획된 오디션 프로그램이었다. 종편채널로는 경이적이라 할 15%대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막을 내렸지만 출연자들의 후일담이나 출연무대들이 연일 방송을 타거나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면서 가히 제2의 트로트 전성시대를 열어갈 기세다.

트로트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는 중장년층은 물론이고 젊은이들까지 텔레비전 앞으로 모여들게 한 것은 출연자들의 남다른 사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오랜 세월 지방 행사무대를 떠돌던 무명가수들이나 고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열정을 버리지 않은 젊은이들, 새로운 시작을 꿈꾸는 개그우먼과 단역배우도 있었다. 단단한 꿈을 꾸었지만 어쩔 수 없이 그 꿈으로부터 밀려나야 했던 출연자들의 사연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일제의 억압과 해방, 분단에 이어진 전쟁의 애옥살이 속에서 태동한 트로트는 그렇게 굽이굽이 한 맺힌 ‘사연의 노래’인 것이다.

‘잰걸음으로 걷다’라는 뜻의 ‘트로트(trot)’는 1910년대에 미국과 유럽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춤곡 ‘폭스트롯(foxtrot)’에서 온 말이다. 그 리듬에다 일본 고유의 음계를 얹은 것이 일본의 ‘엔카(演歌)’이고 그 엔카의 영향을 받은 것이 우리나라 트로트라는 게 정설로 되어 있어서 왜색(倭色)으로 폄훼될 빌미를 제공해온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의 엔카와 우리의 트로트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개연성의 중심에 한 남자가 있다. 코가 마사오(古賀政男)가 그다. 우리나라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그는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가 엔카에 우리 민요의 요소들을 더해 수많은 명곡들을 만들어 엔카의 완성자, 엔카의 비조(鼻祖)라는 이름을 얻은 것이다.

‘달밤은 그에게도 유감인 듯하였다.’는 매혹적인 문장으로 끝나는 『달밤』은 일제강점기 이태준의 단편소설이다. ‘시에는 지용(정지용), 문장에는 태준’이라고도 불리었고 이상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전설로 남은 시 『오감도(烏瞰圖)』를 연재하게도 했던 이태준은 ‘월북작가’라는 꼬리표가 붙어 오랫동안 우리에게 잊히어졌었다. 그 소설 말미에 주인공이 술에 취해 “사께와 나미다까 다메이끼까(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라고 일본말로 노래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노래도 그 시절 일본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코가 마사오의 곡이었다.

<이수일과 심순애>는 어린 시절 내 뇌리에 처음 각인된 유행가였다. 나무전 골목을 지나노라면 길가 막걸리 집들에서 구성진 젓가락 장단과 함께 술 취한 어른들이 부르던 그 노래가 들리곤 했다. ‘대동강 변 부벽루에 산보하는 이수일과 심순애의 양인(兩人)이로다/ 악수논정(握手論情) 하난(하는) 것도 오날(오늘) 뿐이요 보보행진(步步行進) 하난 것도 오날 뿐이라’ 이 이야기 『장한몽(長恨夢)』의 원전(原典)은 일본소설이었고 노래 또한 일본 노래에다 가사만 우리말로 바꾼 것이었다.

(후일 고등학교 때나 군대시절의 장기자랑 시간에 “순애야,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반지가 그렇게도 탐이 났더란 말이냐. 놓아라 찢어진다. 이수일의 고리뗑 쓰봉은” 하고 변사 흉내를 내던 친구들이 꼭 있었다) 그 대목이 두 남녀의 애틋한 이별 장면이라는 것도 몰랐고 ‘악수논정(握手論情)’이라는 말이 ‘손을 잡고 사랑을 속삭이다’라는 뜻이라는 것은 더더욱 알 리 없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그 곡조와 가사가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은 것은 어린아이가 처음 접한 유행가의 매력 때문이었으리라.

일본노래를 불러야했던 시대가 가고 1927년 창작가요 <낙화유수(강남달)>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우리 트로트의 시대가 열렸다. 필자도 서양음악에 물들어 한때 트로트를 저급한 노래쯤으로 여기기도 했었지만 ‘동양의 이싸도라’로 불리며 일제강점기 세계 최고 무용수의 반열에 올랐던 최승희의 <이태리 정원>이나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에서 김태리가 처량하게 읊조리기도 했던 <세기말의 노래>를 듣고 그 시절의 노래에 심취하게 되었었다.

어두울수록 트로트는 더 빛나는 것인가, 이애리수의 <황성옛터>, 고복수의 <타향살이>,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백년설의 <나그네 설움> 등 암울한 시대에 태어난 그 노래들은 세상과 맞서 싸우기 힘겨워 자기연민으로 견뎌내야 했던 우리 민중들의 애환을 고스란히 담은 채로 우리의 품격 높은 자산이 되었다.

“왜 트로트가 좋으냐?”라는 물음에는 흔히 ‘따라 부르기가 쉬워서’, ‘회식자리에서 분위기 띄우기 좋아서’, ‘나이 드니까 저절로’라는 대답이 돌아오지만 그 질문의 진짜 정답은 ‘왠지 내 얘기 같아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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