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탐방[254] 영주1동 1통 ‘선계동’

영주고금지(榮州古今誌)에 옛 지명 선계동(仙溪洞)
비취(翡翠)가 에워 싼 듯 풍광이 아름다운 선계동

선계동(仙溪洞) 전경

영주1동 1통 선계동
영주1동 1통은 영주초등학교 건물 뒤 철탄산(276m)으로 오르는 골짝에 있는 마을이다.

이 곳에 일제 때 신사(神社)가 있어 ‘신사골(神社谷)’이라 부르지만 본래 이름은 ‘선계동(仙溪洞)이었다고 한다. 지난달 21일 선계동에 갔다. 이날 선계정(仙溪亭)에서 전선구 통장, 권분남 할머니, 김춘희 할머니, 윤정순 할머니, 남옥순 할머니 그리고 여러 마을사람들을 만나 마을의 역사와 전설을 듣고 왔다.

영주1동 1통마을
영주동 1번지

역사 속의 영주1동 1통
영주는 본래 고구려의 내이군(奈已郡), 통일신라 때 내령군(奈靈郡), 고려 때 강주(剛州團練使)-순안(順安縣令)-영주(知榮州事)로 불렀고, 1413년(태종13년) 조선의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경상도 영천군(榮川郡,옛영주)이 됐다. 이 때 영천군의 관아가 현 영주초 자리에 세워졌다. 1600년경 군(郡)의 행정구역을 방리(坊里)로 정비할 때 관아가 있던 이곳은 행정구역상 영천군 봉향리(奉香里) 화천방(禾川坊)에 속했다가 영조 때(1750년경) 행정구역을 면리(面里)로 개편하면서 봉향면 화천리로 개편됐다. 조선말 1896년(고종33) 행정구역을 13도제로 개편할 때 경상북도 영천군 봉향면 화천리로 바뀌었다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영주군 영주면 영주리에 편입됐다. 그 후 1940년 영주읍 영주1리에, 1980년 영주시 영주1동에, 1995년 통합 영주시 영주1동 1통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철탄산 아래 선계동
철탄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영주1동 1통 마을 골목길을 많이 이용한다.

이 마을에 오래 산 임여상(79)씨는 “이곳은 원래 ‘선계동’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일제가 이곳에 신사를 지은 뒤부터 ‘신사골’이라 부르게 됐다”며 “해방 후 마을 사람들은 본래 이름을 찾기 위해 시의회 뒷골목 갈림길에 「仙溪洞(선계동)」 표석과 선계길 표지판을 세우는 등 옛 이름 찾기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다가 최근 도로명 주소로 바뀌면서 선계동 표석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철탄길’이란 표석이 세워졌다”고 말했다.

선계동은 기자도 처음 들어본 지명이다. 그래서 선계동을 검색하다 안양원 경우 스님이 지은 ‘구강정(龜江亭) 한시’에 「淸凉不讓仙溪洞(청량불량선계동), 시원한 곳 선계동에 양보 못하고」라는 구절이 있어 스님께 선계동의 내력을 여쭈었다. 경우 스님은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야성인(冶城人) 송 학사(宋泰翼)께서 살아계실 때 ‘영주향토고금지(榮州鄕土古今誌)에 철탄산 아래 옛 지명이 선계동(仙溪洞)이라고 적혀 있다’고 말씀하셨다”며 “그 내력을 밝혀 보라”고 했다. 동우(東寓) 송태익(1896-1974) 선생은 192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영주유림을 대표한 한학자로 안양원창건기, 심원당중수기 등 20여 편의 기문을 남겼다.

낙운정(洛雲亭)

낙운정(洛雲亭)과 선계동
선계동에는 수로왕(首露王)을 추모하여 김해김씨와 김해허씨 문중이 1923년에 건립하고, 1964년에 중수한 낙운정(洛雲亭)이 있다. 금주(錦洲) 황헌(黃憲,1874~1971,평해인)이 지은 낙운정기에 보면 「동족들과 상의하여 강주(剛州) 철탄산(鐵呑山) 아래 선계동(仙溪洞)의 땅을 간택했다. 산은 소백산으로부터 비스듬히 뻗어 남으로 달려 철탄산을 이루었고, 점점 아래로 내려와 별도의 작은 봉우리를 이루었는데 비취(翡翠)가 에워 싼 듯 풍광이 아름다와서 선계동이라 하였다」고 썼다. 기문은 또 「우여초색침렴취(雨餘艸色侵簾翠) 계변취류신시료(溪邊翠柳新詩料), 비온 뒤의 풀빛은 푸른 주렴으로 침투하고, 시냇가의 푸른 버드나무는 새로운 시의 재료이네」라고 했다. 이는 낙운정을 둘러싸고 있는 선계동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다.

어릴 적부터 이 마을에서 살았다는 장광덕(75)씨는 “6.25무렵 선계동에는 낙운정만 있고 가정집은 한집도 없었다. 뒷산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우거져 있고, 시의회 동편에만 집이 띄엄띄엄 몇 채 있었다”고 말했다.

옛 영천군 관아 터
가학루(駕鶴樓)

관아(官衙) 동헌과 문루
옛 문헌(東國史)에 고구려-통일신라 때는 군(郡)의 관아가 구성산 밑 대사동(大寺洞)에 있었다는 기록이 영주지에 보인다. 고려 말 지영주사 군수로 부임한 하륜(河崙,1371년)이 군의 동쪽1리 철탄산 왼편 지맥에 향교를 창건했다는 기록에서 군의 관아(官衙)가 영주초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옛 관아 중심에 아사(衙舍)가 있고 그 앞에 문루, 우측에 형방(刑房) 후면에 서헌(西軒)이 있었다. 아사는 동헌(東軒)이라고도 하는데 지방 관리가 정무를 집행하던 건물이고, 서헌은 지방 관리의 생활 처소로 지금으로 치면 군수 관사인데 현 시의회 동편 뒤에 있었다고 한다. 형방은 죄인을 관리하는 곳으로 구 경찰서 자리다.

옛 영천군 동헌 앞에 문루(門樓) 가학루(駕鶴樓)가 있었다. 1911년 영주향교에서 신교육이 시작되었고, 1917년 관아 자리에 교실을 지어 영주공립보통학교를 개교했다. 이 때 운동장 가운데 있던 가학루는 1923년 구성공원으로 이전됐다.

선게동에서 본 학가산
영훈정(迎薰亭)
선계동 사람들

영훈정(迎薰亭)
선계동 마을 앞 영주초와 시의회 건물 사이에 ‘영훈정’이라는 큰 정자가 있다. 영훈(迎薰)이란 경치 좋은 곳에서 손님을 반갑게 맞이한다는 뜻이다.

이 마을 장광덕 씨는 “영주군청이 여기 있을 때 회의실로 쓰기도하였고,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학사 김응조가 쓴 영훈정 중건기(重建記)에 보면 「1467년(세조13)에 군수 정종소(鄭從韶)가 사신을 마중하고 배웅하기 위한 목적으로 관아 남쪽3리 휴계(休溪)가 경치 좋은 곳(현,광승)에 정자를 짓고 남정자(南亭子)로 불리웠다. 1643년(인조21년) 군수 신속(申속)이 다시 세우고 이황이 쓴 ‘영훈정’ 편액을 새겨 걸었다. 대체로 영남의 빼어난 산수 중에 영천보다 기이한 곳이 없으며, 영남의 아름다운 누정 중에서도 영훈정보다 좋은 곳이 없으니 이런 곳은 세상에 그리 흔치 않은 곳이다」라고 썼다. 임여상씨는 “영훈정은 철탄산을 등지고 학가산(鶴駕山)을 바라보고 있는데 읍내 가까이 있으면서도 시끄러운 분위기가 전혀 없고, 영주시내 경치를 한 눈에 볼 수 있어 좋다”고 자랑했다.

선계동 사람들
영주1동 1통을 선계동(신사골)이라고 한다. 그리고 영주1동 1번지는 시의회 앞 법무사골목 초입에서 아테네(양식당)까지이다.

전선구(71,여) 통장은 “영주1동 1통은 영주의 진산 철탄산 품에 안겨있는 마을로 역사와 전설이 많다”며 “학교 자리에 조선 때 관아가 있었는데 일제가 학교를 짓는다는 핑계로 모두 뜯었다고 한다. 그래도 영훈정과 낙운정이 남아 있어 다행이다. 현재 58가구에 75명이 산다”고 말했다.

이 마을에서 30여년 살았다는 권오늠(69)씨는 “창문을 열면 멀리 학가산이 보이고 가까이는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낙운정 뒤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샘물은 영주 제1의 약수터로 찾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고 말했다. 선계동에서 10여 년간 부녀회장을 했다는 김귀분(75)씨는 “지금은 하천(도랑)을 복개·포장해 길도 넓고 주차장도 있지만 예전에는 사람만 겨우 걸어 다니는 지겟길 밖에 없었다”며 “지금은 숲이 우거져 시원한 숲속마을이 됐다”고 말했다.

김명희(76)씨는 “여기서 새마을시대를 겪었고, 산업화시대를 보냈다. 1960-70년대에는 한 지붕 여러 집이 살기도 했고, 학생들 자취방이 다닥다닥 붙어 있기도 했다”면서 “경사면에 사는 불편함도 있지만 공해가 전혀 없어 잠이 편안하다”고 말했다.

경주서 영주로 시집와 지금까지 선계동에 살고 있다는 전태식(79,여)씨는 “예전에 나무 때 밥해먹을 때는 철탄산이 온통 벌거숭이산이었다. 그러다가 1960년대 후반 연탄이 나왔을 때 ‘참 좋은 세상이 왔다’고 좋아했었다. 세월이 흘러 문명이 발달하면서 연탄보일러-기름보일러-가스보일러로 발전했다”고 말했다. 임권주(46) 부녀회장은 “일제가 만든 ‘신사골’이라는 부끄러운 이름에서 ‘선계동’이라는 본래 이름을 찾게 되어 기쁘다”며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선계동을 널리 알리고, 많이 활용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주화(40)씨도 “선계동이란 이름이 참 예쁘다”며 “대문, 게시판, 마을표지판 등을 이용해 널리 홍보해야 겠다”고 말했다.

강금희(70)씨는 “마을에 창문 달린 현대식 정자(亭子)가 있어 참 좋다. 어르신들에게는 쉼터가 되고, 마을사람들에게는 만남의 장소가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원식 시민기자

전선구 통장
권분남 할머니
김춘희 할머니
윤정순 할머니
임여상 씨
김귀분 씨
장광덕 씨
권오늠 씨
전태식 씨
남옥순 씨
김명희 씨
임권주 씨
이주화 씨
강금희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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