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탐방[259] 가흥2동 아지동

1550년 전의인 이계(李계,司馬公)가 장수고개에 정착
삼수당, 1650년 상현에 세웠다가 1841년 아지로 이건

아지동 마을전경
아지동 표석
아지동 노인회관

가흥2동 아지동 가는 길

아지동은 판타시온리조트 앞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서천교사거리에서 회헌로를 따라 순흥 방향으로 향한다. 아랫귀내와 윗귀내 앞을 지나면 장수고개에 이르게 되고, 장수교를 건너면 바로 아지동이다. 지난달 25일 아지동에 갔다. 이날 아지동경로당에서 오세갑 통장, 안영식 전 통장, 김윤기 노인회장, 정정숙 부녀회장, 이상훈 어르신 그리고 여러 마을 사람들을 만나 마을의 역사와 전설을 듣고 왔다.

역사 속의 아지동

아지동은 조선 때 풍기군(豊基郡) 최남단 영천군과 경계 지점에 있었다. 풍기는 통일신라 때 기목진(基木鎭), 고려 때 기주(基州), 조선 태종13년(1413) 기천현(基川縣)이 됐다가 1450년 풍기군으로 승격됐다. 조선 중기(1700년) 무렵 군(郡)의 행정구역을 면리(面里)로 정비할 때 아지동은 풍기군 동촌면(東村面) 우음리(雨陰里,피끈)에 속했다. 그 후 이곳의 인구증가로 조선 말 1896년(고종33) 행정구역 개편 때 풍기군 동촌면 아지동(阿芝洞)이 됐다. 1914년 일제 때 영주군 안정면 아지동이 됐다가 1980년 영주시 승격 때 영주시 가흥동에 편입됐고, 1995년 통합영주시 가흥2동 10통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장수고개 마을

장수고개와 아지동

「장수왕 69년(481) 고구려군이 소백산을 넘어 순흥에 이르러 장수고개에 성을 쌓고 신라군과 8년간 대치하다가 장수왕 77년(489) 과현(갓골)을 넘어 신라 북변을 내습했다」는 향토사(崔賢,2003) 기록에서 ‘장수고개’는 ‘장수왕’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 조선 때 장사 상(商)자 상현(商峴,장수고개)이라는 지명을 쓰게 됐다. 장사꾼들이 넘나드는 고개란 뜻이다. 예전에 순흥과 동해(울진)를 오가는 소금장사꾼들이 장수고개에서 갓골로 넘어가는 지름길을 이용하면서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경북지명유래총람에 보면 「조선 명종 때 이계(李계,전의인)라는 선비가 장수고개에 터를 잡고 살 때 죽계에 지초가 무성하고 강 건너 산자락의 산수(山水)가 아름다워 언덕 아(阿)자에 지초 지(芝)자를 써 아지골(阿芝谷)이라 불렀다」고 적었다.

삼수당(三秀堂)

전의이씨와 삼수당

장수교에서 아지동 쪽을 바라보면 삼수당(三秀堂)이 우뚝하다. 삼수당은 전의인(全義人) 집의(執義,종3품) 이의(李椅,1611-1703)가 1650년경 장수고개에 세운 정자이다. 삼수(三秀)란 지초(芝草)의 다른 이름으로 1년에 꽃이 세 번 핀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초는 영지(靈芝)라고도 하는데 불로(不老) 즉 장수(長壽)를 상징한다. 그래서인지 삼수당을 지은 이의(李椅)는 93세까지 수(壽)했다.

풍기군수 윤홍리(尹弘리,재임:1684-1689)가 쓴 삼수당기에 보면 「영천(榮川)에 사는 한 지인이 “영천에는 삼수당이 있는데 산천이 수려하고 당우가 드높고 실로 명승이니 한 번 가보지 않으리오”라고 했다. 어느 날 순흥부사 등 10여명이 거기에 들렸다. 주인은 여든이 넘은 호호백발 노인(李椅)이다. 뜰은 맑고 집은 밝고 시원하며 난간 앞에 못이 있고, 난간에 기대어 낚시를 하면 붉은 잉어가 걸리매…」라고 썼다.

서릿골(蟠谷) 출신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司諫,종3품)을 지낸 박시원(朴時源,1764-1842,반남인)이 쓴 삼수당 이건기에 「헌종 7년(1841년) 현 위치로 이건했다」라고 적었다.

이상훈(82) 전의이씨 사마공파 주손은 “당시 삼수당에서 지역 유림 지도자들을 많이 배출했다는 이야기를 선친으로부터 들었다”며 “1841년 춘기에 아지동으로 정자를 이건함과 동시 세거지도 옮겼다”고 했다.

전의이씨 아지동 입향 내력

아지동의 전의이씨는 조선 초 경상우도절제사(慶尙右道節制使)를 지낸 이승간(李承幹)의 후손이다. 절제사의 현손이며 수방(秀芳)의 외아들인 신신(藎臣)이 1480년경 훈도(訓導) 벼슬로 풍기 송동(松洞)에 정착한 것이 이 지역에서 처음이다.

신신의 둘째 아들 계(1511-1578)가 1550년경 장수고개에 세거지를 마련하여 입향조가 됐다. 계는 중종32년(1537) 사마시에 급제(及第)한 후 오직 학문에만 전념했다. 이에 계의 아들 심전(心傳)이 숙종 때 문과로 현감을 지내고, 둘째아들 신전(信傳)또한 문과로 찰방을 거쳐 지중추(知中樞)에 이르렀으며, 신전의 아들(계의 손자) 지걸(之杰) 또한 문과로 정자(正字)를 지냈다. 그 후 계의 증손 의(椅,1611-1703)가 선대의 뜻을 받들어 장수고개에 삼수당을 건립했다.

이상훈 주손은 “계 선조께서 장수고개에 입향하신 후 291년간 세거해 오다가 사마공의 6대손이시고, 저의 7대조이신 통수(通洙) 선조 때(1841년) 아지동으로 세거지를 옮겼다”며 “아지동에 세거한지 178년이 됐다. 지금은 모두 떠나고 저 혼자 고향에 남았다. 제가 직장따라 객지에 나가있는 동안 부모님 봉양하면서 선조 제사 모시느라 제 집사람(장영순,86)이 참으로 고생이 많았다”고 말했다.

의병장 이교영

사마공의 후손으로 삼수당을 세운 이의(李椅)의 8대손인 이교영(李敎永,1873-1910)은 1873년 아지동 전의이씨 유가(儒家)에서 태어났다. 32세(1905) 때 일본의 침략적 야욕인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국권회복 운동에 뛰어들어 경북지역 의병장이 됐다. 그는 300여 명의 의병을 인솔하고 소백산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 일제 앞잡이 소탕, 군자금 조달 등 눈부신 활약을 하다가 1909년 11월 일경에 체포됐다. 이후 공주재판소에서 사형 언도를 받고, 1910년 2월 24일 교수형이 확정되자 “내 목숨을 더러운 일본인의 손에 맡기지 않겠다”며 38세의 나이로 자결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인정해 1995년 8월 15일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판타시온 리조트
아지수영장

아지동 판타시온리조트

판타시온 워터파크는 2008년 7월 19일 화려하게 개장했다. 당시 홍보지에 「장수왕이 아이들과 놀던 유서 깊은 이곳에 아이들의 놀이터 판타시온이 들어섰다」고 홍보했다. 그해 10월 28일 전체 공정율 73%인 상태에서 부도 처리된 판타시온 리조트는 그 후 10여년 넘게 법정경매에서 낙찰과 재경매를 반복하며 새 주인을 찾지 못하고 흉물스럽게 방치되어 있다. 안영식(70) 전 통장은 “최근 임무석 도의원이 5분 발언(1018.10.15)을 통해 道차원 대책마련을 촉구한바 있고, 2019.5.22 안동mbc ‘영주판타시온 리조트 101억원에 낙찰’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지만 현장에는 아무 변화가 없다”며 “市와 도, 시의원, 도의원, 국회의원, 시민 모두 힘을 모아 판타시온 정상화에 힘써 줄 것을 당부한다”고 말했다.

신순한, 서춘희, 강남순 씨
아지동 사람들
경로당 준공식

아지동 사람들

장수교 건너 아지 마을 앞을 지나 구 도로로 접어들면 아지동 표석이 보이고 바로 뒤에 아지동경로회관이 있다. 오세갑(51) 통장은 “어릴 적 제 집이 바로 회관자리에 있었다”며 “당시는 30여호가 사는 제법 큰 마을이었으나 산업화 때 많이 떠나고 지금 20여 세대가 띄엄띄엄 살고 있다. 오늘 여기 모이신 분 외 2-3분만 더 오시면 전원 출석”이라고 말했다. 정정숙(69) 부녀회장은 “마을 어르신들 모두 회관에 모여 윷놀이로 무더위를 잘 보내고 있다”며 “회관에서 놀다보면 재미가 너무 좋아 전화 받을 틈도 없다”고 말했다.

김윤기(71) 노인회장은 “2013년 준공된 아지동경로당은 공공건축 디자인 시범사업으로 진행되어 겉모습이나 내부구조가 다른 경로당과 구별된다”며 “준공식 때 시장님을 비롯한 많은 분들이 오셔서 축하해 주셨다”고 말했다.

회관 앞에 사는 강시원(85)·김금라(78) 부부는 신혼 때 평은면 평은리에서 안정면 아지동으로 살림을 났다고 한다. 외나무다리 건너 시집가던 날 이야기에서부터 장수고개 다리 밑에서 멱 감고 빨래하던 이야기, 사과농사, 5남매 등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는데 다 싣지 못해 아쉽다.

단산 동원리 구미가 고향인 김익분(83) 할머니는 “젊을 때 고생을 많이 해 아픈 곳이 많다”며 “지금은 5남매가 돌아가며 와서 돌본다. 오늘도 큰아들이 와서 소수서원·부석사 구경 시켜주고 갔다”고 말했다.

아지에서 태어났다는 안순영(72) 씨는 “선대는 북한에 살다가 십승지를 찾아 풍기로 온 정감록파”라며 “일족(一簇)이 욱금으로 갔으나 선친께서는 아지동에 정착하셨다”며 “예전에는 사과농사를 많이 하였으나 지금은 벼와 일반 밭농사를 많이 짓는다”고 말했다. 마을의 옛 모습과 경로당의 일상을 재미있게 말씀해 주신 신순한, 서춘희, 강남순 씨께도 감사드린다.

오세갑 통장
안영식 전 통장
김윤기 노인회장
정정숙 부녀회장
이상훈 전의이씨 주손
장영순 할머니
강시원 어르신
김금라 씨
김익분 할머니
안순영 씨

 

이원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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