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탐방[264] 종편(마지막회)

2014년 3월 첫 연재 후-1호도 빠지지 않고 매주보도
삼국시대-고려-조선-일제 이후 행정구역 변천사 기록
지명유래·세거내력, 사람들의 표정과 삶의 현장 담아

단산면 마락리(2014년 3월)
부석면 소천4리(2017년 2월)
새내마을과 성황당(2014년 11월)
달밭골 사람들(2019년 1월)
갓골마을 사람들(2018년 8월)

영주사랑 대기획 우리마을탐방이 263회(2019.9.19)로 마무리 됐다. 지난 5년 6개월 동안 영주의 최북단 단산면 마락리에서부터 최남단 평은면 강동1리까지, 내성천 동쪽 평은면 천본리에서 영주의 서쪽 끝 장수면 성곡2리까지 총 263개 마을을 두루 살폈다.

문헌에도 없는 역사를 마을 사람들을 통해 알았을 때 보물을 찾은 듯 가슴이 뛰었고, 선조들이 마을이름을 지을 때는 규칙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감탄하기도 했다. 마을탐방은 각 마을의 역사와 지명유래를 밝히는데 주력하면서 격동의 현대사를 살아온 주민들의�삶의 현장을�사진과�함께�실었다.

 

지역사랑 대기획 우리마을탐방

마을탐방의 시작

기자는 단산면 병산3리(젓돌)에서 태어났다. 누가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봄소풍은 소수서원으로 가고, 가을소풍은 부석사로 갔다”고 답하니 “우-와! 참 좋은 곳에서 살았네”라고들 했다.

1969년 초등교사가 되어 첫 소풍도 소수서원으로 갔으니 소수서원과는 각별한 인연이다. 2011년 정년퇴직 후 사회복지협의체가 주관하는 실버기자단에 참여해 기사쓰기교육을 받고 실버기자로 활동한 것이 시민기자가 된 동기다.

2013년 12월 본사 오공환 편집국장이 “우리고장 각 마을탐방을 통해 마을의 역사와 지명유래를 기록하는 일을 하여야 하는데 하실만한 분이 안 계신다”면서 “한 번 해보시라”고 권했다.

며칠 후 오 국장에게 “제가 한 번 해 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2개월여 준비과정을 거쳐 2014년 3월 13일자부터 ‘우리마을탐방’이 연재되기 시작했다.

 

행정구역의 변천사

행정구역(지명)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시대에 따라 바뀌기도 하고 통폐합되기도 했다.

영주는 삼국시대 때 고구려의 날이군, 통일신라 때 급산군, 고려 때 강주-순안-지영주사, 조선 때 영천군, 일제 때 영주군이 됐다.

순흥은 고구려의 급벌산군, 통일신라의 급산군, 고려 때 흥주-순정-흥령현령-지흥주사-순흥부, 조선 말 순흥군, 일제 때 순흥면이 됐다.

풍기는 통일신라 때 기목진, 고려 때 기주, 조선 초 기천, 1450년 풍기군, 일제 때 풍기면이 됐다.

 

삼국시대 때 영주

삼국시대 때 영주 이야기

삼국사기에 나오는 ‘소지왕과 벽화 이야기’가 가장 오래된 이야기다. 신라 소지왕이 499년 변방 순시 차 날이군(영주)에 왔다가 태수(파로)의 딸 벽화에 반해 국정을 팽개치고 몰래 영주를 오가다가 죽었다. 그로부터 176년 후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했다. 의상이 악의 무리들(고구려의 잔존세력)을 몰아내고 부석사를 창건한 해가 676년이고, 신라가 삼국통일한 해가 676년이다. 그래서 영주의 역사는 676년을 기준으로 그 이전에는 고구려의 영토, 이 후는 통일신라 땅으로 보면 고대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당시 부석사 주변 지역이 고구려의 ‘이벌지현(伊伐支縣)’이라고 기록에 나온다. 이 이벌지현이 조선(1413년) 초 일부석면(단산면), 이부석면(용암리), 삼부석면(부석사)으로 개편됐다.

 

선조의 지혜담긴 지명(地名)의 규칙

선조들이 마을이름을 지을 때 한자의 훈(訓)과 음(音)을 조합하여 마을이름을 지었다. 부석면 ‘소천리’는 조선 때 황해도 감사를 지낸 정옥(鄭玉)의 호(號) 우천(牛川)에서 유래됐다. 소천은 소 우(牛)자에서 ‘소’자를 따고 내 천(川)자에서 ‘천’자를 따 소천이 됐다. 이는 훈과 음을 조합하여 지은 지명이다.

이산면 내림리의 속칭 ‘수구리’의 본래 이름은 임구(林丘)였다. 수풀 임(林)자에서 ‘수’자를 따고 언덕 구(丘)자에서 ‘구’자를 따 ‘수구리’가 됐다. 이 또한 훈과 음의 조합이다. 장수면에 가면 ‘물미’라는 마을이 있다. 입향조 김은풍의 호가 퇴산(退山)이다. 물러날 퇴(退)자에서 ‘물’자를 따고 뫼 산(山)에서 ‘뫼’자를 따 ‘물뫼’라 불렀는데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발음이 변해 ‘물미’가 됐다. 이는 훈과 훈의 조합으로 지은 이름이다.

 

선조의 호(號)나 명성(名聲)에서 따온 지명

이산면에 ‘번계들’이 있다. 번계는 백암(栢巖) 김륵(金륵)의 둘째 아들 김지선(金止善)의 호다. 번계공(樊溪公)은 내성천 물줄기를 서쪽으로 밀어내고 많은 농토를 일구어 냈다. 기름진 농토를 얻은 마을사람들은 번계공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공의 호를 따 마을이름을 ‘번계(樊溪)’라 했다.

예천임씨 양양군 임자번(林自蕃)은 세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오위도총부도총관 겸 내금위장을 지내고, 1482년(성종14) 형조판서에 올랐다. 그는 세종에서 단종, 세조, 예종, 성종에 이르기까지 5임금을 모신 명장이요, 충신이었다. 양양군의 후손들이 1550년경 영천(영주)에 터를 잡고 마을이름을 ‘조골(조골))’이라 했다. 조골은 수리 조(조)자에 송골매 골(골)자를 써 조골(조골)이라 했다. 조골은 용맹의 상징이다.

 

단종절신 충절의 마을

순흥은 마을 전체가 단종을 신으로 모시는 마을이다. 금성단(錦城壇)이 있는 단촌(檀村) 마을과 그 주변에는 대를 이어 단종을 모시는 가문이 많다. 읍내리 사람들은 해마다 정월대보름날 두레골 상단에 가서 소 한 마리를 제물로 바치는 제사를 지낸다. 또 예전에 석교리 사람들은 대평서당에 모여 정축지변 때 희생된 65家에 대한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단산면 사천2리 띄기(茅溪)는 단종절신마을로 유명하다. 안정면 내줄리에는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백촌(白村)�김문기(김녕김,文起,1399-1456)의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다.

 

온계(溫溪)와 퇴계(退溪)의 처가?

온계와 퇴계는 영주로 장가를 들었다. 퇴계의 형 온계 이해(李瀣)는 18세 되던 해(1514년) 이산면 신천2리 머름(斗巖)에 사는 연안김씨 김복흥(金復興,1482-1537)의 딸(만취당의 고모)에 장가들어 처가에서 공부하다 문과급제 후 상경했다.

퇴계는 21살이 되던 1521년 영주 휴천3동 초곡(草谷,푸실)에 사는 창계 문경동의 사위 허찬(許瓚1481-1535,)의 맏딸인 허씨 낭자에게 장가를 들었다. 당시 퇴계의 장인인 허찬은 창계 선생의 재산을 이어받아 큰 부자였다. 허찬은 사위 퇴계에게 “이 서방, 돈 걱정 말고 오직 학문에만 열중하게”라고 했을 것이다.

 

박병남 할머니의 생전 모습

故 박병남 할머니의 유언

본지 마을탐방(543호 2015년 10월30일자 보도)에 소개된 故 박병남(97) 할머니는 노환으로 요양병원에

뒷골 마을유래판 제막행사

서 치료를 받다가 2016년 2월 13일 운명했다. 할머니의 아들 정준(73) 씨가 본사를 찾아와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 ‘내 이야기를 신문에 실어줘서 정말 고맙다’ ‘내 노령연금통장에 쓰다 남은 돈이 있거든 얼마가 되든 영주시민신문사에 보내 내 성의을 전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셨다”며 “어머니 통장에 남은 돈 40만 6천원 중 20만원을 영주시민신문사에 기부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 사연을 듣고 신문사 직원들은 큰 감동을 받았다.

 

검색창에 「∼면 ∼리」 치면 마을이 뜬다

영주시민신문은 주 16면 3천800부 발행하여 전국 각지로 배송된다. 우리마을탐방 기사가 본지 홈페이지에 뜨면 우리고장 각 향우회, 각급학교 동창회, 유림단체 등에서 마을탐방 기사를 빠른 속도로 퍼다 나른다.

마을탐방 독자들은 인터넷 검색창에서 ‘○○면 ○○리’를 검색하여 마을의 역사와 유래를 애독한다. 영주시민신문 홈페이지에서 ‘∼면 ∼리’를 치면 마을이 떠오른다.

 

격동의 현대사 이야기

지금 마을에 사시는 8-90대 어르신들은 격동의 현대사를 살아온 역사의 증인들이다. 마을탐방을 통해 어르신들이 겪은 이야기를 많이 담았다.

야성송씨 집성촌 목골에 사는 송옥석 할머니는 “아이들 학교 시킬 때 지독하게 가난했다. 소 팔아 대학 등록금 낼 때 정말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겪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잘 한 일 같다”고 했다.

봉현면 하촌1리 황순애(80) 할머니는 “양은다라이에 소죽 담고, 그 위에 점심밥과 주전자를 얹는다. 아이를 업고 소죽 다라이를 겨우 머리위에 올렸다. 산길을 따라 해발300m 다락논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다. 숨이차고 목이 빠지는 것 같아 좀 쉬고 싶어도 내렸다가는 다시 머리에 일수가 없어 그냥 참고 올라야만 했다”고 말했다.

 

3천명 인터뷰, 6천장 사진 올려

마을탐방을 위해 2주 전 이장과 사전 약속을 한다. 그리고 사전 답사, 본 탐방, 보충 탐방 등 각 마을마다 3회 이상 가야 기사가 완성된다.

마을 이장을 비롯한 노인회장, 부녀회장, 새마을지도자 등 마을마다 10명 이상 인터뷰 했다. 그리고 마을의 전경과 마을의 상징 등을 사진으로 담았다. 그래서 총 3천여 명을 인터뷰 하고, 6천여 장의 사진을 올렸다. 마을마다 마을탐방 기사를 차곡차곡 모으는 분들이 많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300명은 넘어요”라고 했다.

 

뒷골마을이 준 감사패
선계동 표석

뒷골 마을유래판과 선계동 표석

‘마을탐방’은 영주시민신문 기획시리즈 기사로 영주지역 마을의 유래와 역사, 주민들의 삶을 담아냈다. 문수면 권선리 뒷골이야기는 본지 725호 16면에 소개됐다. 뒷골마을의 역사, 덕수장문의 입향내력, 12남매의 우애 등이 실렸다. 마을사람들은 이 기사를 그대로 ‘마을의 유래판’으로 제작하여 동구에 세웠다. 이날 마을잔치를 열고 기자에게 감사패도 전달했다. 장효진 노인회장님과 장세일 선비포럼대표님께 감사드린다.

마을탐방은 영주초 뒤 신사골 취재과정에서 신사골의 본래 이름이 선계동(仙溪洞)이었다는 이야기를 임여상 씨로부터 들었다. 기자는 각종 문헌을 통해 선계동의 유래와 근거를 찾아냈다. 마을사람들은 동(洞)에 건의하여 ‘선계동 표석’을 동구에 세우고 지난 9월 5일 기념사진을 찍었다.

 

마을탐방 사랑에 감사드려요

마을탐방 취재에 적극 협조해 주시고 애독(愛讀)해 주신 각 마을 이장님, 노인회장님, 부녀회장님, 새마을지도자님 그리고 경로당 어르신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어렵고 힘들게 살면서도 자식 공부에 모든 것을 바치신 어머니의 사랑이 최대 감동이었다. 기자가 마을에 가서 비문 등을 찾아다닐 때 가시덤불을 헤쳐가면서 길을 열어 주셨던 어르신들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끝으로 마을탐방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영주시민신문사와 편집·교정·응원해 주신 신문사 가족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이원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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