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봉(작가)

삽화 이청초

<돈데 보이(Donde Voy)>는 미국의 멕시코 이민자 2세 가수 티시 이노호사의 노래다. 많은 멕시코 사람들이 어떻게든 좀 먹고 살아보려고 미국 이민국 감시원들의 눈을 피해 국경을 넘는다. 트럼프가 장벽을 세우겠다고 게거품을 무는 그 국경을 말이다. 그 노래는 ‘마드루가다 메 베 꼬리엔도(Madrugada me ve corriendo)’라는 가사로 시작된다. 멕시코 노래니까 물론 스페인 말이다. ‘이른 아침부터 나는 달리네’라는 뜻의 첫머리부터 이 노래는 불법이민자들의 고단한 신세를 말해준다. ‘어디로 가야 하나, 어디로 가야 하나(Donde Voy, Donde Voy)’로 정점을 이루며 이 노래는 꿈을 찾아 달릴수록 따뜻한 당신의 품으로부터는 멀어지고 있다는 절망적인 넋두리로 끝난다. 난데없이 이 노래를 떠올린 것은 영국의 작은 항구에서 발견된 한 냉동컨테이너 때문이었다.

지난 주말 런던 남동쪽의 작은 항구 에식스에 방치된 화물트럭에 실린 그 컨테이너에서 39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영국 경찰당국의 중국인들로 추정된다는 발표가 있었지만 모두 베트남인들이라는 게 밝혀졌다. 불법밀입국알선조직에게 우리 돈 1천500만에서 4천만 원까지의 거액을 주고 컨테이너에 갇혀 배에 올랐지만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 잘 사는 나라에서 돈을 벌어 고향의 식솔들을 먹여살려보겠다는 그들의 꿈은 처참히 무너져버렸다. 경찰의 눈을 피하려고 냉동컨테이너로 위장하고는 그대로 방치해버려 영하 25도의 컨테이너 안에서 그들은 비극적으로 죽어가야 했다. ‘엄마, 사랑해. 숨을 쉴 수가 없어. 죽을 거 같아. 미안해, 엄마’ 20세의 베트남 여성이 어머니에게 보낸 마지막 문자였다.

이상한 연상이지만 <돈데 보이>의 첫머리 ‘마드루가다 메 베 꼬리엔도(Madrugada me ve corriendo)’의 ‘꼬리엔도(달리다)’라는 말이 한국 사람을 뜻하는 스페인 말 ‘꼬레아노(Coreano)’와 겹쳐서 들린다. 오늘날의 멕시코 사람들이 갖은 위험을 무릅쓰고 국경을 넘는 것처럼 우리나라 사람들이 찢어지게 가난한 팔자를 바꿔보겠다고 멕시코로 가는 배에 오른 적도 있었다. 1905년 ‘묵서갗(墨西哥, 멕시코의 한자 차음)은 문명 부강국이요 수토(水土)도 좋고 기후도 따뜻하여 병질이 없는 나라이니 노동을 하면 큰 이익을 볼 수 있다’는 인신매매꾼에 가까운 일본인들의 사기성 광고에 속아 1천33명의 조선인들이 인천 제물포 항에서 배에 올랐다. 한 달 반의 고달픈 항해 끝에 멕시코의 유카탄 반도에 도착했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희망이 아니라 뜨거운 태양 아래서의 노예와 같은 중노동과 무서운 풍토병뿐이었다. 감독관들의 채찍에 맞아 죽거나 풍토병으로 죽거나 너무 힘겨운 삶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까지 있었지만 계약기간인 4년만 기다리면 고국에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에 기대어 살았다. 그러나 그들의 계약기간이 끝났을 때는 그들의 나라는 지구상에서 사라져버렸다. 일본의 강제병합으로 대한제국의 이름으로 발급된 그들의 여권은 휴지조각이 되어버렸고 돌아갈 고국도 사라져버려 수십만 리 이국땅에 눌러앉을 수밖에 없었지만 고국의 독립자금을 모으는 데는 누구보다 열성적이었다고 한다. 그들의 후손들이 에니껭이라는 이름으로 4만 명가량이 중남미에 흩어져 살고 있다. 1세대 이민자들이 일한 곳이 용설란 밭이었는데 용설란이 멕시코 말(스페인 말)로는 ‘에네켄(henequen)’이어서 에니껭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슬픈 이야기다. 멕시코만이 아니었다.

구한말이던 1900년대 초 미국 공사 알렌의 주선으로 ‘살기 좋고 돈도 벌 수 있는 곳’이라는 환상을 좇아 7천여 명의 동포들이 하와이로 이주했다. 뜨거운 사탕수수 농장에서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던 그들은 고국에서 보내온 처녀들의 사진만 보고 데려와 결혼을 하기도 해 ‘사진 신부’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일제의 수탈과 지긋지긋한 가난을 피해 보따리를 이고 지고 중국의 동북 3성으로 떠나야 했던 이들에게도, 관부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떠나 ‘죠센징(朝鮮人)’이라는 이름으로 멸시를 받으면서도 모욕을 삶을 살아내어야 했던 사람들에게도, 빼앗긴 조국을 되찾아야겠다는 신념으로 바람 찬 북만주 벌판을 헤매던 이들에게도, ‘위안부’라는 아픈 이름으로 남지나의 전쟁터로 끌려 다녀야 했던 이 땅의 애달픈 처녀들에게도, 해방을 맞았건만 찢어지게 가난한 조국을 떠나 낯설고 물 설은 독일 땅으로 간 60년대의 광부들과 간호사들에게도 머나먼 타국의 삶은 외롭고 고달프고 처량한 것이었다.

아직도 이 땅에서 그 비극이 다 끝난 것은 아니다. 지금도 차디찬 두만강을 건너고 있거나 라오스나 캄보디아의 험한 산 속을 헤매고 있는 북녘 동포들의 비극이, 노래 <돈데 보이>에서처럼 꿈을 좇아 갈수록 따뜻한 당신으로부터 멀어지는 안타까운 삶이 실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영주시민신문(www.yjinews.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