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과 더불어 비어져가는 삶의 공간”

(촬영 이영규 기자)
(촬영 이영규 기자)

원래 땅위에는 길이란 없었다.
걸어 다니는 사람이 많이 있으면 그것이 길이 되는 것이다. -노빈, 「고향」

영주1동사무소 앞에 그려진 벽화

광복로에 그려진 벽화

영주1동 행정복지센터 앞 정비공장 벽에 벽화가 그려졌다. 가운데를 비워둔 채, 한 쪽엔 옛 영주역을, 또 한 쪽엔 후생시장을 그리더니, 마지막으로 가운데를 채워나갔는데, 내용은 태극기를 흔드는 무명고의적삼을 입은 사람들이었다. 1945년 8월 15일 이 길 위에서 있었던 감격의 순간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길을 ‘광복로’라 이름 지었다.

‘광복로’라는 이름 짓기 전에는 영주초등학교에서 서쪽으로는 풍기통로였고, 동쪽으로는 봉화통로였다. 그 복판에 이정표와 도로원표가 있다. 도로원표의 위치는 북위 36° 49′, 동경 128° 37′이다. 도로원표는 1997년 만들어진 것인데, 이정표는 그 이전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만들어진 시기가 지워져 있다. 많은 사람들은 도로원표가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것이려니 생각하는데, 1914년에 세워진 것은 전국에 열 곳뿐이었다.

시가행진을 선도하는 악대(1970년대 영주초등학교 앞)
도로 원표

도로원표와 관공서

도로원표 주변엔 관공서가 많이 모여 있었다. 가장 가까이에 영주초등학교가 있었고, 그 옆으로 경찰서, 군청, 교육청 그리고 1972년에 옮겨간 우체국(현 영주문화파출소 자리)과 1979년에 이건한 소방서(현 가든빌딩 자리)까지 생각한다면 모든 관청이 이 주변에 있었다. 무슨 연유일까? 그것은 이곳이 예부터 영주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엔 영주초등학교의 자리에 영주관아가 있었다. 일본은 이 땅을 점령하며, 권위의 상징이었던 관아를 헐고 학교를 지으면서 애민을 외치지나 않았을까? 이런 사례는 다른 곳에도 많이 있다고 한다.

이곳은 50년 동안 많이도 달라졌다. 군청 자리는 시의회로, 교육청 자리는 청소년문화의 집으로, 우체국 자리는 경찰서 민원실로 사용하다가 문화파출소로 바뀌었다. 결국 영주의 중심에서 변방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예전에 이 거리는 사람이 득실거렸다. 관공서에 드나드는 이가 많기도 했지만, 거의 모든 행사가 이곳에서 이뤄졌기 때문이다. 영주초등학교 운동장은 영주군민들의 광장이었다. 행사를 마치면 으레 시가행진을 했는데, 행렬의 맨 앞엔 악대가 섰다. 분수대를 돌아서 후생시장 옆을 지나 경찰서까지 오는 짧은 거리였지만 ‘잘 살아 보자!’는 의지를 다지기에 충분한 거리였다.

도로원표에서 ‘청소년문화의 집’을 지나면 시의회 주차장이고, 바로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을 우리는 한 동안 ‘소방삼거리’라 불렀다 그 이유는 가든빌딩이 있는 자리에 소방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방서 앞 중앙통은 선거유세장으로 유명했다. “말 잘 한다 ○○○, 돈 잘 쓴다 ○○○, 찍어주자 ○○○”는 소리가 어린 우리에게도 들려올 정도로 선거 바람은 세찼다. 그 때 말 잘 하는 그 후보가 이번에 떨어지면 죽어버린다고 칼을 단상에 두고 유세를 했다는 일화는 오래도록 회자되기도 했다. 그리고 소방서 옆에 고인이 된 이두식 화백이 어린시절을 보냈던 집(영주사진관)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찾을 수 없다.

도로 건너편 4층 병원건물 자리에는 중국집이 있었고, 건물 옆 골목 안쪽엔 연탄공장이 있었다. 중국집 앞을 지날 땐, 늘 창문 안을 힐끗 보면서 지나갔다. 자장면은 졸업식 때나 먹을 수 있는 특별한 음식이었기에 자장면 먹었다는 것은 친구들에게 큰 자랑거리가 되기도 했다.

작은 주차장 옆에 있는 분식집도 오래된 건물이다. 예전에 순두부를 제대로 먹을 수 있는 집으로 유명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조기축구회 사람들은 여기에서 아침을 먹었다.

아침마다 쏟아져 나온 6천명의 아이들

가죽공방을 지나면, 흥해낚시와 화랑표구사 사이로 중앙초등학교가 보인다. 문득 ‘중앙(옛 중부)초’와 ‘영주초’가 참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원당천(현 원당로) 너머 아이들을 동부초등학교가 수용했다면, 두 학교는 나머지 아이들을 감당해야 했다. 60년대 후반, ‘중앙’의 규모는 한 학년에 7반 정도였고, 한 학급엔 60여명이었으니 오늘날 기준으로는 큰 학교였다. 그런데 ‘영주’는 ‘중앙’보다 더 큰 학교였다. 두 학교만 해도 6천명이 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많은 아이들이 어디에 살았을까? 시내? 시내보다는 철탄산 아래였다. 철탄산 아래엔 골이 많다. 보름골, 향교골, 사례골, 신사골, 숫골, 수용소골, 관사골…. 그리고 골마다 골짝 안에서부터 산 중턱까지 집들이 빼곡하게 있었다. 조그만 땅만 있으면 집을 지었고, 집집마다 방을 몇 칸씩 달아냈다. 그래서 한 지붕 세 가족은 보통이었고, 한 칸이라도 더 여유를 만들어서, 중고등학생들에게 자취방으로 내주었다. 그래서 아침 등교시간이면 광복로는 철탄산 골짜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학생들로 꽉 찼다.

그 땐 텃세도 심했다. 골짜기 사이의 능선을 두고 편을 갈라서 하는 전쟁놀이는 초등학교 아이들의 일상이었다. 그리고 시내에서도 다른 학교 아이를 만나면, “중부빼이, 영주빼이”하며 으르렁거리면서 서로의 경계선을 넘지 않으려 조심하기도 했다. 그래서 어른이 된 요즘 ‘중부초’ 출신들은 ‘영주초’ 구역인 영주역 주변에서의 추억이 거의 없다고 한다.

지금 상망동행정복지센터 자리엔 ‘대한석탄공사 영주임무소’가 있었다. 조선시대부터 이곳에는 지역 교육을 후원했던 ‘향서당’이란 전각이 있었는데, 1961년 영주대홍수 이후에 새 건물이 들어서면서 없어지고 만다. 그 때 들어선 임무소는 강원도 탄광을 관리하며 1960년대 영주 발전을 주도하게 된다.

이 주변에 살았던 친구의 이야기는 늘 허기 속에 살았던 사연이어서 가슴이 아팠다. 보원당약국과 동성당한약방 사이 어디쯤 아이스케키 공장이 있었는데, 돈이 없어 늘 보고만 지나 다녔다는 이야기를 하며,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어렴풋한 기억을 끄집어냈다. 길모퉁이에 있었던 구멍가게에 진열한 사과를 거의 무의식적으로 들고 집에 가서 엄마에게 보였다가, 어머니 손에 끌려 다시 가게로 와서, 주인에게 사과를 하였다고 한다. 그때 어머니께서 사죄를 드리는 모습이 평생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며, 그래서 평생 남의 물건에 손을 대지 않게 됐다는 일화였다. 모두가 없던 시절, 그 때, 그 어머니의 가슴은 얼마나 더 아팠을까?

 

신창정미소

금붕어 가두리양식장

상망동행정복지센터를 지나 몇 걸음 걷다보면 특별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인력, ˜도료, ˜샤시, ˜인테리어, ˜설비” 등의 간판이 눈에 띄게 많다는 것이다. 옛 건물에 조그마하게 들어선 것도 있지만, 제법 규모 있게 새로 지은 집들도 눈이 뜨인다. 언제부터 여기에 이렇게 모인 것일까? 어디든 쉽게 갈 수 있는 이 길의 특성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시내 중심보다 땅 값이 헐하기 때문일까? 하지만 더 자세히 보니 몇몇 곳은 이미 비어있는 점포 같다.

건너편에 장수헬스 사우나가 보인다. 1960년대 바로 저 자리를 비롯해, 길 양편으로 가두리 양식장이 있었다고 한다. 사방 2˜3m쯤 되는 작은 논(?)에 금붕어를 키웠는데, 참 장관이었다고 한다. 그 무렵 우리 집에도 금붕어를 키운 것 같다. 도자기처럼 생긴 유리어항에 모래를 깔고 수초를 넣어 치장을 했었다. 그리고 다방에 가면 어디든 커다란 수족관이 있었다. 그 때의 유행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젠 LED로 만든 벽걸이형 수족관으로 실내를 장식하는 세상이 됐다고 한다. 발전하는 기술에 대한 찬사보다 생물을 접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오히려 측은하기만 하다.

이제 동산교회에 거의 도착했으려니 하는데, 어디서 참새소리가 들린다. 주변 가로수를 둘러봤지만 보이지 않는다. 소리의 진원지는 신창정미소였다. 방앗간으로 들어서니 참새들은 파드닥 천정 가장 가까운 보로 날아가 버린다. 참새가 눈치가 백단이란다. 정미기를 돌리면 어디로 숨었는지 감쪽같이 사라졌다가 시동이 꺼지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나타난다고 한다. 방앗간 참새들은 하나같이 통통히 살이 올라 있었다.

동창산업(1960년대)

여성 노동력을 해방시킨 정미소

방앗간 외벽에 걸려 있는 경상북도에서 만들어준 ‘향토뿌리기업’이란 동판이 의아해서 시작 년도를 물어 보았다. 동판엔 ‘since 1987’로 적혀 있는데, 나무로 돼 있는 정미기의 틀과 건물이 그 연도에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87년은 지금 주인이 이 정미소를 인수한 해라고 한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때에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추정한다는 말을 곁들인다.

향교골 가는 길 입구 건너편에 더 큰 정미소가 있다. 아마도 영주에서 가장 큰 정미소일 것이다. 정부 양곡을 도정하는 동창산업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장물도가’라는 이름에 익숙하다. 그것은 일제 때에 간장공장이 있던 자리였기 때문이다. 광복이 되면서 도가를 인수하여 정미소로 바꾸었다고 한다.

개항 후, 인천에서 시작한 정미소는 광복을 전후하여 면 단위까지 만들어지게 된다. 우리의 피부에 와 닿는 근대화의 물결이었다. 집에서 방아를 직접 찧어 밥을 해야 했던 시절, 방아 찧고 밥을 하면서 하루를 보냈던 여성에게 이 정미소는 그야말로 그들의 노동을 해방시켜 주는 공간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광복로에는 정미소가 많다. 1960년대만 해도 일곱 군데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위치는 모두 광복로의 동쪽과 서쪽에 위치했다.

동창산업 외벽에도 최근 벽화가 그려졌다. 영화 ‘삭발의 모정’ 포스터이다. 이 영화는 1960년대에 만들어진 작품인데, 향교골에서 있었던 실화이다. 휴가 나온 아들에게 쌀밥 한 번 먹여서 귀대시키고 싶은 어머니가 자신의 머리를 잘라 팔아서 쌀밥을 지어주었다는 슬픈 이야기이다. 젊은이들이 쌀밥이 귀했다는 이야기나 머리채가 돈이 된다는 이야기를 이해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언제 어디든 고귀한 추억이 있었다

향교골로 들어선다. 예전엔 도랑이 있었지만, 지금은 복개가 되어서 길이 넓어졌다. 또 동산교회 아래로 번듯한 집들이 동네를 돋보이게 한다. 동쪽 식당에서 영주여고 쪽으로 돌아 오르면 동산교회 뒤편이다. 역시 길이 시원하다. 이 작은 고개 옆으로 밭이 있었고, 겨울이 되면 여기서 연을 날리곤 했었다. 내리막길로 잠시 내려가면 영주여고 입구이다. 이 길은 명륜길이다. 영주향교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영주여고 정문을 보면서 시내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바로 식치원이 나온다. 영주시에서 “음식으로 몸을 치유한다.”는 이석간의 가치를 복원한다는 큰 뜻을 가지고 만든 공간이다. 사전예약으로 치유 음식을 체험할 수 있다. 이 자리에도 아주 오래된 기와집이 있었다. 한 여름에도 이 옆을 걸을 때면 더위를 식힐 수 있을 정도의 큰 고택이었다.

식치원을 지나 영주시의회 뒤편으로 걸어 본다, ‘2011년 생활형 지역공공디자인 시범사업’이 이루어진 곳이다. 그때 조성된 주차장이 마을을 훤하게 만들었다. 곳곳에 그려진 낡은 벽화가 새롭게 치장해 달라고 손짓을 한다. 이제 영주초등학교 안에 있는 영훈정을 지나면 다시 도로원표이다. 영훈정 옆에서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신사의 자리가 어디일지 가늠해 본다.

그리고 오늘 걸었던 곳의 큰 변화는 100년 전 그 때 벌써 시작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변화를 어찌 거부 할 수는 있으랴. 하지만 어느 곳이든 한 시절 축복 받았던 곳이란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언제 어디든 고귀한 추억은 항상 있기 때문이다.

김덕우 /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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