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봉(작가)

삽화 이석희

이상한 겨울이다. 꽤 오래 전부터 비정상적으로 따뜻한 겨울을 뜻하는 이상난동(異常暖冬)이라는 말이 있어오긴 했지만 올 겨울 만큼 일관되게 춥지 않은 겨울은 없었던 것 같다. 추위다운 추위 한 차례 없이, 눈다운 눈 한 번 날리지 않고 대한(大寒) 아침을 맞았다. 

대한이 한 해 24절기 중 맨 마지막이니 이제 보름만 있으면 입춘(立春), 봄이라는 얘기가 아닌가. 입춘 추위, 꽃샘추위라는 말도 있으니 예년 같으면 아직 매운 추위가 아주 물러간 건 아니겠지만 올겨울은 고추같이 매운 추위가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예감이 쉽지 않다.

겨울이 꼬치(고추)같이 매웠던 시절에는 추위에 대한 말들도 많았었다. 입학시험 때만 되면 수험생이나 학부모들의 손을 호호 입김으로나마 녹여야 했던 입시한파를 시작으로 김장추위, 소한추위, 대한추위, 정월 초하루 추위, 입춘추위, 꽃샘추위 등이 겨우내 우리를 움츠려들게 했었다. 

‘대한(大寒)이 소한(小寒)네 집 가서 얼어 죽었다’, ‘소한에 언 얼음 대한에 녹는다’는 속담에다가 봄의 시작을 뜻하는 입춘(立春)까지도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면 ‘입춘방(立春榜) 거꾸로 붙였나’, ‘입춘에 오줌독 깨진다’, ‘입춘 추위는 꿔다 해도 한다’ 같은 속담들을 입에 붙이고 살던 시절도 있었다. 추웠던 겨울의 기억이다.

그 시절의 겨울은 월동(越冬)을 할 두어 가마니의 쌀과 김장김치, 방구들을 덥힐 땔나무나 연탄 이삼백여 장을 장만하기도 힘겨웠던 가난한 가장(家長)들의 낮은 지붕들 위로 차디차게 다가왔었다. 소백산에서 내려 온 날 선 바람이 서천교를 건너면서 강물을 꽁꽁 얼어붙게 하고 삽재를 넘어 온 매서운 한기(寒氣)가 허술한 입성의 사람들 어깨를 잔뜩 움츠리게 하면서 겨울은 그렇게 무서운 얼굴로 다가왔었다. 

마당 한켠의 얼어버린 펌프를 뜨거운 마중물 몇 바가지로 녹여 어렵사리 길어 올린 얼음장같이 찬 물에다 어머니가 데워놓은 뜨거운 물을 타서 벌꿀비누를 묻히는 둥 마는 둥 대충 얼굴에 물을 바르고 후다닥 방으로 뛰어 들라치면 얼마나 추웠던지 문고리가 얼어 젖은 손에 쩍쩍 달라붙곤 했었다. 무릎이나 팔꿈치에 색색들이 헝겊을 덧 댄 빠삐용 줄무늬의 내복 위에 검은 무명으로 지어 만든 교복을 걸쳐 입고 토끼털 귀마개를 하고 학교 가는 길에는 두 뺨과 코가 빨갛게 얼어붙었었다. 

손은 늘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다녔지만 손등이 터서 피가 나는 아이들이 태반이었고 시도 때도 없이 흘러내리는 콧물을 닦아 검은 무명 교복 소매는 촛농을 먹인 것처럼 꾸덕꾸덕해져서 하얗게 반들거렸었다. 가을에 선생님의 호각 소리에 발맞춰 철탄산이나 조와리 뒷산에 올라 따다 놓았던 솔방울로 난로를 지펴 교실을 덥혔지만 그마저 떨어지면 오돌 오돌 떨면서 곱은 손을 호호 불어가며 받아쓰기나 덧셈, 뺄셈을 해야만 했었다. 나갈 종(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치면 꽁꽁 얼어붙은 운동장에 나가 뛰어 놀 엄두는 못 내고 양지바른 교실 벽에 옹기종기 어깨를 맞대고 붙어 서서 해바라기를 하곤 했었다.

그 시절의 겨울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어른들에게는 전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고된 노동으로 받은 일당으로 하루치의 연탄 두 장을 사서 새끼에 꿰어 관사골이나 숫골 얼어붙은 언덕길을 오르는 가장의 뒷모습에서, 폭설 때문에 암면(탄광 지대였던 철암 방면을 그때는 그렇게 불렀었다)에서 오는 석탄 수송이 끊기면 연탄공장 마당에서 다만 너 댓 장의 연탄이나마 구해 식구들의 잠자리를 덥혀보겠다고 시린 발을 종종거리며 길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던 어머니들의 지친 등 뒤에서, 시내 전역에 목조 적산가옥들이 많았던 터라 하루에도 몇 번 씩 불자동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다니던 그 시절, 불타버린 집 앞에 주저앉은 사람들의 넋 나간 표정에서, 그 시절의 겨울은 적개심의 이빨을 허옇게 드러내고 있었다.

1981년 1월 5일, 양평, -32.6도C / 1933년 1월 12일, 중강진, -43.6도C. 기상관측이 시작된 이래 남한과 북한에서 가장 낮은 수은주가 기록된 수치다. 이 수치들이 말해주듯 가장 추운 달이 1월이다. 낮 온도가 좀처럼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 이상한 겨울의 한 가운데, 1월, 그것도 대한(大寒) 아침에 옛날의 그 추웠던 겨울이 문득 그리워지기도 해서 써본 글이다. 설날 아침도 꼬치같이 추웠었는데 올 설에는 비가 온다는 예보다. 가족들 두루두루 따뜻하고 행복한 설날 보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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