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창수(전 영주문화원 이사)

영주시 휴천1동 광승이마을 뒷산에는 높이 10m, 지름 7m가량의 큰 바위가 있는데, 마치 항아리모양에 뚜껑을 덮어놓은 듯하여 갓 바위 또는 뚜껑바위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이 바위를 매우 신령(神靈)시 하였는데, 여기에는 슬프고 애절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 동네는 조선초기부터 야성송씨(冶城宋氏)집성촌으로 약 백여 호가 평화롭게 살고 있는 제법 큰 동네이다. 이 마을에 송석(宋石)이란 소년이 살았는데, 마을에서 약 십리 가량 떨어진 못골(文亭里)마을 서당을 다니고 있었다. 이 소년은 유난히 천진스럽고 머리가 약간 둔한 편이어서, 공부가 영 신통치 못했다. 그래서 또래 학동들 사이에서 쉽게 어울리지 못하니, 서당에 다니는 것이 재미가 없었다.

어느 날, 책을 옆에 끼고 서당을 가다가 못골 어느 나무 밑에서 책을 베고 누웠다가 깜박 잠이 들었는데, 어떤 노인이 나타나서 <이놈아, 너는 공부가 하기 싫으면 힘이라도 세어야 할 것이 아니냐? 지금 즉시 못가에 가보면, 풀 숲속에 커다란 잉어들이 모여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큰 놈을 날 것으로 한 마리를 다 먹어라. 그러고 나면 너를 놀리던 아이들이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한 뒤 사라졌다.

깜짝 놀라서 일어난 소년은 노인이 일러준 대로 풀 숲속에서 가장 큰 잉어를 골라 그 자리에서 한 마리를 먹어버렸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온 몸에 힘이 솟구치는 기분이 들어 못 둑의 버드나무를 지긋이 밀어보니,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맥없이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소년은 천하를 얻은 듯한 기분으로 천천히 서당을 향했다. 그때 아이들은 감나무에 매달려서 연시를 따고 있었다. <얘들아! 늦어서 미안하다. 그 대신 너희들에게 호사나 태워주마! 자~ 모두들 나뭇가지를 단단히 붙잡아라.>하고 송 소년은 감나무 밑둥치를 끌어안더니 감나무를 뿌리째 뽑아서 휘휘돌리다가 슬며시 땅에 내려놓았다.

아이들은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줄행랑을 쳐버렸다. 이 소문이 사방으로 퍼져나가자, 송 소년은 송장사(宋壯士)로 불리게 되었다. 며칠이 지난 뒤, 늦장마로 큰비가 내려 서천의 물이 많이 불어나서, 마침 냇물을 건너야할 이웃동네 상여가 건너갈 수 없게 되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송장사가 상두꾼들까지 모두 상여에 올려 태우고, 혼자서 상여를 번쩍 들어 냇물을 건너 놓았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서울 장안에 까지 펴져나갔다. <그놈을 살려 두었다가는 필경 나라에 큰 우환거리가 될 것이다>라고 임금에게 간언하여 송 장사를 죽이라는 명령이 내렸다.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송 장사는 어머니에게 말씀드리기를 <아무리 저를 죽이려고 해도, 저의 겨드랑이 밑에 비늘이 붙어있는 한 저를 건드리지 못합니다.>이렇게 부모님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부모님들은 <나라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온 집안이 화(禍)를 당할 것이다>라는 관원의 엄포와 계속되는 독촉으로 온가족들이 불안 속에 떨었다.

드디어 부모님은 마음의 결단을 하고, 한 밤중에 깊이 잠든 아들의 겨드랑 밑에 붙어있던 비늘을 떼어버렸다. 그러자,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고, 아들은 두 눈을 부릅뜬 채, 문을 박차고 뛰쳐 나가더니, 몸을 공중으로 높이 날렸다가, 땅바닥에 떨어져 숨을 거두고 말았다.

몇 일후에, 갑옷과 투구를 실은 용마(龍馬)가 나타나서 구슬프게 밤낮으로 울더니 갑옷과 투구를 갓 바위 속에 넣어 놓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은 사람들이 신령스러운 갓 바위를 찾아와서 아기들의 수명(壽命)을 빌고, 가족들의 무사태평을 기원하고 있다.

<참고: 우리고장의 전통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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