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자미 시인

폐허 이후

- 도종환

사막에서도 저를 버리지 않는 풀들이 있고
모든 것이 불타 버린 숲에서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믿는 나무가 있다
화산재에 덮이고 용암에 녹은 산기슭에도
살아서 재를 털며 돌아오는 벌레와 짐승이 있다
내가 나를 버리면 거기 아무도 없지만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으면어느 곳에서나 함께 있는 것들이 있다
풀무더기에 덮여 메말라 버린 골짜기에
다시 물이 고이고 물줄기를 만들어 흘러간다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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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절망의 순간, 폐허를 보듯 공허의 순간, 인생을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 ‘재를 털며 돌아오는 짐승’을 생각할 때가 있었다. 힘 센 글귀 하나에 지친 마음을 걸어 볼 때가 있었다. 위안을 얻을 때가 있었다.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은 있었을 것이다. 사연과 상황이 다를 뿐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은 있을 것이다. 살아봐야겠다. 살아내야겠다는 간절하고 절박한 마음이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으면’ 일 때 비로소 생겨나는 마음이다. ‘모든 것이 불타 버린 숲에서도/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믿는 나무’처럼 ‘사막에서도 저를 버리지 않는 풀’처럼 화산재에 덮이고 용암에 녹은 산기슭에도/살아서 재를 털며 돌아오는 벌레와 짐승'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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