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서각(시인·문학박사)

우리가 사는 경북 북부지역은 영남 유림을 자랑스러운 정신문화의 자산으로 여기고 있다. 그래서 영주는 ‘선비의 고장’, 안동은 ‘정신문화의 수도’, 예천은 ‘충효의 고장’이라 한다. 모두 선비정신과 관련된 이름들이다. 영주는 퇴계 선생이 소수서원에서 강학하시던 곳이다, 퇴계의 제자 금계 황준량 선생은 단양군수로 계실 때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세금을 내지 못하자 상소를 올려 세금을 내지 않게 한 애민사상을 실천하셨다.

안동의 유림들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자 수많은 선비들이 자결하거나 식음을 전폐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석주 이상용 선생은 노비를 해방하고 아흔아홉 칸 임청각을 처분하여 만주벌판에서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치셨다. 권오설, 김지섭 등 수많은 독립지사를 배출한 곳이다. 영주의 기려자 송상도 선생은 전국을 다니시며 유림의 독립운동의 사적을 하나하나 기록하여 ‘기려수필’에 남기셨다.

말년을 봉화 바래미에서 마치신 심산 김창숙 선생은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는 ‘파리장서’에 바래미의 선비와 닭실 선비들의 서명을 받으시기도 했다. 영주의 선비들과도 교류하며 나라걱정을 나누셨다. 심산은 해방 후 유림의 정신으로 나라의 근간을 세우고자 가산을 정리하고 전국 유림의 뜻을 모아 성균관과 성균관대학교를 설립하셨다. 꺼져가던 유림의 불씨를 살리려던 심산 선생의 바람은 이승만에 의해서 좌절되고 만다. 이승만은 자기를 비판하던 심산을 성균관에서 쫓아내고 친일파 이명세를 유림대표와 성균관대학 총장 자리에 앉힌다. 이명세의 손녀가 요즘 국회에서 ‘사퇴하세요’라고 고함치기로 유명한 의원이다.

안동mbc 티브이의 기획 프로그램 ‘오래된 약속’ 가운데 ‘영남의 어른’이 있다. 지금 살아있는 영남의 원로들 가운데 선비정신을 계승하거나 올곧은 정신으로 본받을만한 삶을 살아오신 분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는 지난날 영남 유림의 선비정신을 계승하자는 취지에서 기획된 것이다. 지금까지 소개된 분들의 면면을 보면 서예가 석계 김태균, 독립지사이자 시인인 육사의 딸 이옥비, 프랑스에서 온 두봉 주교, 역사학자 이이화, 도예가 천한봉 등의 어른들이 소개되었다. 특이한 것은 이분들 가운데 유림에 이름을 올린 분들이 없다는 것이다.

며칠 전 미래통합당(전 새누리당) 안동 예천 선거구 국회의원 후보에 김형동이라는 분이 공천되었다. 그러자 안동 유림 27인 이름으로 이른바 ‘격문’이라는 것이 발표되었다. 성명서도 아니고 격문이다. 격문이라는 말을 이럴 때 쓰는 줄 처음 알았다. 내용인즉, 황교안 대표에게 공천을 철회해 달라는 것이다. 이유는 그가 친문이며 좌파 선동꾼이라는 것이다.

공천된 분이 누구인지 검색해 봤다. 그는 변호사이며 박근혜 탄핵 때 탄핵 시위에 가담했으며 세월호 빼지를 달고 다니기도 했다. 그런데 그가 친문이라는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친문은 더불어민주당 안에 있는데 그는 더불어민주당 당원이 아니다. 그런데 유림이란 분들은 그를 친문이라고 한다. 그분들은 아마 박근혜 탄핵에 찬성한 모든 사람들을 친문이라고 하는 것 같았다. 유림이란 분들의 생각이 이 정도라는 사실에 매우 놀랐다. 지역에 사는 사람으로 이런 물음을 멈출 수 없다. 박근혜에게 유림이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가? 영남에 유림이 있는가? 심산 선생 같은 유림다운 유림이 몹시도 그리운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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