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용호(전 영주교육장·소백산자락길 위원장)

한손에 필을, 한손에 총을 들고 한 시대의 정신적 지주로 살았던 독립운동가 김학철(金學鐵)과 송지영(宋志英)은 둘 다 북쪽 출신 1916년생 동갑나기이다. 그러니까 올해로 탄생 101주년을 맞는다.

중국 조선족의 정신적 지주였던 김학철은 2001년 9월 25일 8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해 가을 그는 “작가는 책을 못 보고 글을 못 쓰면 이미 생명이 끝난 것”이라며 “내가 죽거든 일러둔 친지 12명 이외의 조객은 받지 말고, 추도식도 하지 말 것이며, 중국 땅엘랑 묻지 말고, 화장을 해 ‘김학철 원산행’이라는 꼬리표를 붙여 두만강에 띄워라”는 유서를 남기고 단식 20일 만에 이승의 내용물들을 관장으로 말끔히 비운 다음 단정한 자세로 조선의용군 시절로 돌아가 수의 대신 늘 입고 다니던 중산복 차림으로 홀연히 떠났다고 한다.

김학철은 함남 원산에서 출생해 공립소학교를 마치고 서울 보성고보에서 재학 후 중국 상하이로 갔다.

그곳에서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하면서 중앙육군군관학교(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의용대의 분대장으로 활동하던 중 태항산 전투에서 허벅지 관통상을 당하면서 포로가 되었다. 그의 나이 25세 때의 일이다. 일본 나가사키형무소에 이송된 후 전향 거부를 이유로 상처를 3년 6개월이나 방치하여 결국은 다리를 절단한 채 복역하다가 광복이 되면서 석방되었다.

평생을 외다리로 살게 되는 운명을 가지고 옥우(옥友) 송지영과 함께 서울로 돌아왔으나 공산당원으로 좌익활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군정청의 체포명령이 떨어지자 1946년 누이동생과 함께 월북하게 된다.

거기서 《로동신문》 기자로 일하다가 김일성 정권의 실체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동란(1951년)의 혼란을 틈타 다시 만주로 망명하였고,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정착하여 작품활동을 하였다.

1954년에 발표된 장편소설 『해란강아 말하라』 는 1930년대 만주벌 간도지방으로 이주해 간 조선농민들이 해란강가 마을을 중심으로 펼치는 항일무장투쟁을 주제로 한 민족의 대서사시라고 한다.

여기서의 휴식도 잠시, 1960년대 중엽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아직 발간도 되지 않은 『20세기의 신화』를 반혁명적인 반동작품으로 몰아 또다시 10년간 징역살이를 시키게 된다. 김학철은 이렇게 3개 국가의 탄압에도 권력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간 사람이다.

그동안 장개석, 주은래, 박헌영, 여운형, 김일성, 모택동 등 내노라 하는 역사의 슈퍼인물들과 만나 교감했지만 그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았다. 그래서 중국 조선족들은 ‘김학철’ 이름 하나만으로도 민족의 자부심을 갖게 하는 지주라고 한다.

우인 송지영의 원래 고향은 평안북도 박천군이었다. 집안이 정감록에 심취되어 그의 나이 열두 살 때 동네사람들과 함께 피난지라는 풍기로 내려왔다.

1937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여 이듬해 만주특파원이 되었다가 중국 상해시보(上海時報) 기자로 활동 중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와 연통하여 비밀공작을 했다는 이유로 일경에 체포되어, 법정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일본 나가사키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송지영은 여기서 수감 중이던 김학철과의 운명의 만남을 갖게 된다. 일제 패망으로 풀려난 송지영은 거기서 만난 김학철과 함께 귀국하여 거처가 마땅치 않았던 그를 고향 풍기로 데려와 자신의 사랑채에서 얼마를 함께 지내기도 하였다 한다.

그러나 1946년 김학철의 월북으로 소식이 두절된 지 43년만(1989년)에 귀국한 백발의 김학철을 송지영은 맞이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직 뽀얀 흙으로 덮여 있는 그의 묘소를 찾은 김학철에 의해 그들의 우정이 확실히 입증되면서 영원한 미담으로 뿌리내리게 된다. ‘외다리로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그를 처음 문학의 길로 들어서게 한 것도 바로 나가사키형무소 감옥 동료 송지영이었다는 거였다.

광복 후 송지영은 주로 언론기관에서 논설위원·편집국장·주필을 맡는 등 큰 언론활동을 하면서 한 시대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감당해냈다.

그래서인지 5.16 때는 혁명재판소에 의해 사형이 언도되기도 했다. 다행히 국제펜클럽의 노력으로 감형되어 8년 2개월 만에 출옥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하였다.

독립운동-감옥살이-언론활동-감옥살이-문학활동-감옥살이 등으로 감옥을 나들이 하듯 드나들었지만 평생을 ‘구름에 달 가듯이(남재희 표현)’ 살았고, 김학철 역시 달관한 사람인 양, 한쪽 다리를 절단하고 나온 그를 붙잡고 엉엉 우는 감옥 친구 송지영에게 도리어 “송형! 내가 우산귀신이 됐으니 이제 비 맞을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 하며 킥킥거렸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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