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취당 정자
만취당대묘(晩翠堂大廟)
소장 전적
교지
만취당 유허비

안집사 김륵, 의병장 김개국, 부장 이흥문 등
왜군의 죽령 진출 저지, 상주 당교 왜군 토벌

■ 충효의 기운이 서려있는 두암(斗巖)
이산면 신암2리 두암 마을은 연안김씨 집성촌으로 마을 앞에 만취당(晩翠堂) 정자와 사당(祠堂)이 있다. 만취당은 김개국(金盖國,1548-1603)이 건립한 정자로 2003년 경북문화재자료 제451호로 지정됐다. 만취당은 김개국의 호이면서 정자 이름이다.

■ 김개국의 선대(先代)
두암의 연안김씨는 세종 때 형조판서를 지낸 문정공(文靖公) 자지(自知,1367-1435,7세)의 아홉째 아들 구(俱,佐軍司正)의 후손들이다.

단종복위운동이 한창이던 당시, 구(俱)의 형 잉(仍)의 사위인 성삼문이 단종복위를 꾀하다 멸문지화(1456)를 당하자 연루의 화가 미칠까 두려워 소백산 깊숙한 곳에 숨어살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행방이 묘연한 상태가 됐다. 

이 때 낙남(落南)을 결행한 분은 구(俱)의 부인 인천이씨다. 남편의 유지를 받들어 아들 세형(世衡)과 여종 하나를 데리고 소백산 남쪽 순흥 땅을 찾아와 이곳 두암(斗巖)에 터를 잡으니 이때가 1457년이었다. 두암에 정착한 세형(世衡)의 증손이 만취당이다.

■ 만취당 김개국은
그의 집 서쪽에 소나무(松) 수백그루가 있었다. 설한(雪寒)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는 곧은 절개를 닮고 싶어 편액을 만취당(晩翠堂,늘푸른 소나무)이라 하고 호로 삼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했다. 소고 박승임 문하에서 공부하여 1573년 사마시(司馬試)를 거쳐159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1592년(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지역민들의 추대로 의병장(義兵將)이 되어 왜적을 막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 해 가을 형·예·공의 3조랑(三曹郞)을 거쳐 강원도사, 충청도사, 옥천군수를 역임했다. 

■ 대를 이은 충성심
조정은 전황을 만회하기 위해 경상도에 김성일(金誠一)을 초유사(招諭使)로 김륵을 안집사(安集使)로 임명했다.

경상도로 내려온 김륵은 만취당 김개국(金蓋國)을 대장(大將)으로 할 것을 권했다. 이때 만취당은 “부모님이 연로하시다”는 이유를 들어 사양했다.

그러자 그의 부친(김몽득金夢得)은 오히려 다음과 같은 말로 의병을 일으킬 것을 적극 권유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국은을 입었으나 그 은혜를 조금이라도 보답하지 못했다”며 “네가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을 정벌하는 데 작은 보탬이라도 된다면 그보다 더 큰 광영이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의병장으로 나간 아들이 늙은 아버지를 걱정하지 않도록, 노봉정(蘆峯亭) 현재 오록(烏麓)으로 가솔을 이끌고 들어갔다. 이에 만취당은 눈물을 흘리며 의병장 직임을 맡았다.

■ 영주지역 의병 창의 조직도
임진왜란 당시 작성된 영주지역 의병 창의(倡義) 조직도에 보면 안집사(安集使) 김륵(선성인), 의병대장 김개국(金蓋國,연안인), 부장(部長) 이흥문(李興門,우계인), 정재장(淨財長) 김대현(金大賢,풍산인), 참모 박록(반남인)·금복고(琴復古,봉화인)·장여치(張汝値,인동인)·김융(金隆,함창인), 사서 사병 사량 박선장(朴善長,무안인)·권호신(權虎臣,안동인), 척후장(斥候長) 장여홍(張汝弘,인동인)·장여기(張汝起,인동인) 이성백(李成栢) 등 당시 영주지역 문인들의 이름이 모두 올라 있다.

■ 왜군의 죽령 진출 저지
고니시(小西行長)를 선두로 한 일본군은 1592년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하여 동래부사가 이끄는 군사들을 차례로 격파한 후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북상을 계속하여 4월 23일 상주에 도착했다.

만취당은 군사들의 실정과 향리(鄕里)의 이점을 살린 유격전을 전개했다. 그는 병사수의 많음보다는 병사의 정예 여부에 승패가 결정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노약자에게는 군량을 운반하는 임무를 맡기는 한편, 힘 있는 이들을 모집하여 전투병으로 활용했다. 전투방식에 있어서도 의병들은 대부분 부근에 거주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적의 진출로 및 수비가 용이한 지역에 매복해 두고 기습 공격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이를 통해 많은 전과를 올리고 일본군의 죽령 진출을 막았다.

■ 만취당의 관동일록(晩翠關東日錄)
만취당이 임진왜란 당시 기록한 일기(1596-1599)에 보면 처참한 광경이 잘 나타나 있다.
「호남이 한 번 왜적의 변란을 겪고서 인심이 환산(흩어짐)되었다. 전주 남원 거진(巨鎭)에 절제사 진영(陣營)이 있었는데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도로에 즐비했다. 경작도 못하고 머리에 이고 등짐을 지고 서로서로 붙들고 손을 잡고 가는 피난민들의 상황이 눈에 가득하여 참담하다. 머리에 이고 등에 진 짐을 자세히 보니 기울어진 상자에 텅 빈 섬이었다. 장차 어디에 가서 밥을 먹을지 알 수 없다. -1598년 6월」

■ 상주 당교(唐橋) 전투 참전
만취당은 고향 영주를 방어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왜군이 집단적으로 모여 있는 상주 당교 지역을 공격하는 작전을 전개했다. 당시 왜군은 수시로 인근 고을을 배회하면서 무자비한 침탈을 계속했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우리 측 관군과 의병들은 당교와 그 인근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 토벌에 병력을 집중했다. 특히 이곳과 그렇게 멀지 않은 거리에 있던 안동과 영주 등 경북 북부 지역의 의병들이 앞장서서 이곳을 공격하여 왜군에 큰 타격을 줬다.

만취당 부대가 당교 전투에 참여했음은 만취당이 이광윤(李光胤), 이개립(李介立) 등과 함께 문경에 주둔해 있던 이여송(李如松)에게 ‘빨리 일본군을 공격하자’는 내용의 편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 만취당 유허비
만취당 솔숲 앞에 선생의 유허비가 2016년 3월 제막됐다. 후손들이 성금으로 세운 비다. 

김종일 종친회장은 “만취당 묘역 주변을 성역화 중”이라며 “만취당 선조께서 의병대장으로 활약하실 때 이 지역(아랑골)은 군수(軍需)기지였다. 그래서 만취당 주변과 아랑골 일대를 성역화 사업에 포함시켜 나라 사랑(愛國) 체험장으로 널리 활용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만취당은 의병장으로서, 뛰어난 목민관으로서의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또 그의 언행은 만인의 귀감이 되었고, 학문과 행동을 겸비한 군자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스스로의 재능을 내세우지 않고 세속적인 공명을 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재능에 비해 그의 족적은 상대적으로 미약했다. 56세라는 짧은 인생을 살다간 그를 두고 모두는 수명이 짧음을 아쉬워했다.

이원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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