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 노병의 마지막 꿈 “설월당 할배 유적을 복원하고 싶어요”

여느 지방 중소 도시처럼 영주도 인구가 급격히 줄고 있어 지방소멸위험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당국이 각종 인구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인구증가 정책이 출산장려와 귀농 귀촌 운동에 머물렀다면 앞으로는 귀향운동으로의 패러다임 변화가 절실하다.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 머물고 있는 지역 출향인은 대략 3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에 본지는 이들 출향인이 은퇴 후 자신이 평생 직장생활을 하며 쌓아온 경륜을 귀향을 통해 고향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는 애향인 인터뷰를 마련했다. 이번 애향인 인터뷰를 통해 인구증가를 위한 귀향정책과 지역발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편집자 주>

고교 졸업 후 33년 동안 의무행정 장교 복무

장군 승진 청탁의 기회도 마다한 참군인 출신

 

군 예편 후 한국서화협회 초대작가 활동 ‘왕성’

선조 설월당 전익희 유적, 방산종택 복원 추진

219기 임관55주년 정기총회 시(2023.4.18)
219기 임관55주년 정기총회 시(2023.4.18)
고향 영주의 봉송대(한국서화협회 간행 도록에서)
고향 영주의 봉송대(한국서화협회 간행 도록에서)
2016년 국제미술대전초대전에서 상을 받으며
2016년 국제미술대전초대전에서 상을 받으며

영주 아랫보름골 출신으로 설월당 전익희 선생 후손의 자부심을 갖고 고향을 사랑하는 애향인이 있다.

그는 선조의 유적 복원을 추진하고 있기도 하다. 바로 재경영주시향우회 전준하 고문이 그다. 전준하 고문은 고등학교 졸업 후 장교로 임관해 33년 2개월을 군문에서 봉직했다. 집안 형편상 대학 대신 군입대를 택한 진로였다. 주로 의무행정 장교로 복무했으며 퇴임 시 대통령 훈장(보국훈장 삼일장)과 대통령 표창도 받았다. 월남 파병(맹호부대)도 다녀왔다.

퇴임 후 전 고문은 자신의 장기인 그림에 매진, 한국서화협회 초대작가라는 새로운 길을 걷고 있다. 전 고문은 1945년생이지만 기억력과 건강은 젊은이 못지않았다. 현재도 책을 읽고,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며, 자전거 타고 헬스장을 가는 활동이 그의 일상생활이다. 그의 생활습관으로 미뤄 백세 시대의 모델이 될 듯도 하다. 본인 스스로도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한다. 그는 지금도 재경향우회를 비롯 고향 관련 모임에 꼭 참석하는 애향인이다.

어디에서 태어나셨나요?

1945년 12월 10일 아랫보름골(일명 갱변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부모님(부 전재석, 모 이을순)은 당시의 많은 사람처럼 가난 속에 사셨지요. 아버지는 9세 무렵에 영주향교에서 한학을 배우셨어요. 정규교육은 받지 못하셨고요. 어머니는 공주 이씨입니다. 제가 태어난 곳은 지금 많이 변했습니다. 이산면 들어가는 길 건너편 지금 아파트가 있는 곳, 예전엔 야산이었습니다. 동네 입구엔 우물이 있었습니다.

부친이 한학을 계속하셨나요?

웬걸요. 그럴 형편이 되나요. 13세 되면서 당시 일제강점기 사방공사에 투입돼 일하셨어요. 이때 석축공사 기술을 배우셨습니다. 그 뒤 술 만드는 양조기술도 배우셨지요. 부모님은 일찍 결혼하셨습니다. 십대 중반에 중매로 결혼하셨지요.

부모님이 평소 자녀들에게 어떤 말씀을 강조하셨는가요?

아버지는 평소 우리에게 ‘많은 사람 중에 뛰어난 사람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엄지손가락을 세우면서 말씀하셨지요. 그 외에 ‘노력해라’ ‘정직하게 살아라’ ‘남에게 절대 해를 끼치지 마라’고도 하셨습니다. 큰 백노지를 여러 번 접어 공책 크기로 잘라 우리 남매들에게 천자문을 가르치시고 글씨도 쓰게 하셨어요. 한자 필법 기초도 그때 배웠습니다. 우리 말이 한자에서 많이 나왔다고 말씀하시면서 한자를 쓰게 하셨지요. 국민학교도 다니지 못한 분이셨는데... 아버지는 당신이 가진 석축기술로 영주의 문화유적도 만들었답니다. 바로 영주제일교회 건축입니다. 친구분이셨던 강동석씨와 함께 건축하셨습니다.

국민학교 때 실기대회 마치고 강인숙 선생님과(단기4292.10.29)
국민학교 때 실기대회 마치고 강인숙 선생님과(단기4292.10.29)

학교는 주로 고향 영주에서 다니셨는지요?

영주중부국민학교 11회, 영주중학교 12회 졸업입니다. 고등학교는 안동고를 나왔구요. 7살에 영주동부국민학교 입학했다가 술 주정 기술로 취업한 아버지 따라 영월에 가서 2년 뒤 그곳 구래국민학교에 다시 입학했지요. 

3년 뒤 영주로 돌아와 영주중부국민학교 2학년부터 다녔습니다. 동급생 보다 나이가 많아 키가 커 학교에서 5대 장다리로 불렸습니다. 5대 장다리는 나, 전우창, 하기성, 김춘학, 우병용이었어요. 중학교 입학 후 집안 형편상 안정면 대룡산 동네로 시집간 둘째 누님댁에 얹혀살았습니다.

누님이 시집 가신지 얼마 안 되었을 때라 새댁으로 눈치가 많이 보였겠지요. 그 마을 친구들 5, 6명이 영주중학교에 진학했습니다. 친구들과 걸어서 등교하니 지각을 많이 했습니다. 영주대홍수 땐 평소처럼 영주농고(지금의 영주제일고) 앞으로 지나다 서천교 진입로가 휩쓸려 한절마 쪽으로 돌아가니 엄청 등교가 늦기도 했어요. 학교 지각했다고 담임선생에게 두드려 맞기도 하고 기합도 받고 그러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친구들 보다 두 살 정도 많으셨는데 문제가 없었나요?

티를 내기 싫어서 나이를 물으면 묻지 말라고 했어요. ‘나는 나이 모르고 사는 사람’이라고 했어요. (함께 웃음)

젊음을 군에서 보내셨지요? 장교로 퇴임을 하셨는데 왜 장교로 입대하셨는지요?

고등학교 졸업 후 대구에서 약국 수금사원 생활을 6개월 정도 하다가 고향에 왔습니다. 아버지가 군청(당시 영주군청)에 세금을 1천200원인가 1천300원인가를 납부하고 오라 하셔서 오가는 길옆 벽에 ‘경북병무청 간부 후보생 모집’ 벽보가 붙어 있길래 응시했습니다. 당시 수험번호가 860번이었어요. 안동고 졸업생 13명이 응시했는데 둘만 합격하고 다 탈락했어요.

처음에 포병 병과였는데 나중에 의무병과로 옮겨 의무행정 장교로 계속 군문에 있다가 예편했어요. 의무병과는 가장 많이 올라가면 대령이지요. 대령으로 퇴직을 했습니다. 남들이 기피하는 병과였지만 나는 전력을 다해 맡은 임무를 수행했어요. 장군을 하려면 고향 선배들을 찾아보라는 주변 권유가 많았지만 찾지 않았습니다. 당시 장모님이 김계원 장군 부인과 친했는데 절대 청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육사에 갈 수도 있지 않았나요?

가난하게 살다 보니 사관학교 입학 관련 날짜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어요. 지금에야 정보를 찾기 쉽지만 그땐 시골에서 응시 준비에 정보도 부족하고 방법도 잘 모르고 그랬어요. 날짜를 넘기기도 했고요.

청탁하셨거나 정규 사관학교 갔으면 장군으로 퇴직하셨을텐데 안타깝습니다.

미련 같은 거 없습니다. 군대 관련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결혼할 때 장모님이 나에 대해 알아보니 징병기피자로 되어 있더라는 겁니다. 난 이미 장교로 근무하고 있는데(함께 웃음).. 결혼을 중매로 했는데 풍기로 시집갔던 사촌누님이 중매를 섰습니다. 김계원 장군댁 옆 영전사에서 전통혼례로 결혼했지요. 당시 월남파병 근무 중 결혼식을 했습니다. 결혼식을 하고도 파병근무를 하다 3개월 후 귀국했습니다.

월남 파병 당시

월남 파병도 자원하셨군요?

초기 전방에서 소위로 근무하고 브리핑을 잘 한다고 브리핑도 여러 곳에서 했습니다. 근무지는 동서남북 여러 곳이었지요. 의무행정 장교 부임 후엔 전군 관할 의무 분야 메디컬 서비스를 모두 지원하는 업무를 했습니다.

90년대 말 울진 무장 공비 사건, 818 도끼만행 사건, 121 김신조 침투, 월남파병 등... 월남 파병은 자원했습니다. 예정보다 빨리 가라더군요. 내 앞에 지원한 사람들이 신원조회 과정에서 탈락했더라고요. 그곳에서 의무행정 장교였는지라 전투는 하지 않았지만 삶과 죽음의 현장에 있었지요.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더 강해졌고요.

예편은 언제 하셨는지요?

67년 3월 입대, 99년 5월 31일부 국방부 전역입니다. 당시 대통령인 김대중 대통령이 준 보국훈장을 받았지요. 대통령이 준 표창은 노태우 대통령 때에도 받았구요. 제대 후엔 한동안 전쟁기념관에 8대 관리사업소장을 했습니다. 당시 전쟁기념관 이사장은 고향 영주 출신이었어요. 전쟁기념관에 각 군 협회가 있는데 당시 육군협회 회장이 백선엽 장군이었습니다.

그림 그리기가 특기였는데 군 생활 중에도 그리셨는지요?

군에서는 매일 비상 걸리고 훈련하고 그러는데 화판 펴고 그림 그리면 욕먹어요. 군 제대 후 가장 잘 하는 걸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다시 시작했지요. 99년 5월 말 제대하자마자 시작해서 벌써 20년이 흘렀네요. 현재 한국서화협회 초대작가입니다. 중학교 다닐 땐 1년 선배 이두식 교수랑 같이 그림을 그렸어요. 대령 현역으로 있을 때 합판 사업하던 친구 이종선이랑 같이 그분과 해후했지요. 중학교 시절 미술 교사였던 오세영 선생님 이야기도 하며 옛이야기를 했습니다.

영주중학교 때 그림을 잘 그리셨군요?

국민학교 때부터 그렸습니다. 5학년인가 6학년인가 그때 영주중부국민학교의 명예를 높였다고 어른들이 크게 칭찬하기도 했어요. 그림을 잘 그려 아동 실기대회 특선하고 영주 시내 국민학교에서 내가 가장 우수였다고 했어요. 안동이나 다른 곳에 가서 경상북도 대회 특선도 하니까 학교 이름을 드날렸다고 하더라고요. 선생님들이 막 좋아했어요. 옛날 사진에 보면 선생님이 강인숙 선생님이었는데 안동교대 졸업하고 22살에 영주중부국민학교에 부임했어요. 3학년 4학년 때부터 6학년 졸업할 때까지 그 선생님에게 배웠어요.

나이 드신 분의 고향 추억은 고향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가난의 추억도 포함해서.

어렸을 때, 논 옆 산비탈에서는 소나무 가지 꺽어 비탈을 타고 신나게 미끄러지기도 했고요. 송구 베껴 먹고 배변 시 고생하고 피사리 해서 구수한 맛을 느끼기도 했지요. 광승에 살 때에 어린 남매들이 놀다 퇴각하는 누런 군복의 인민군들이 포복으로 산을 기어 올라가는 것도 보았어요. 그냥 속으로 ‘나쁜 사람들이구나’라고 생각했지요.

귀향하실 생각은 없나요?

한때 귀향 생각이 있었어요. 금선정 바로 옆에 땅이 나왔다길래 사려고 했어요. 이미 팔렸다더군요. 그때만 해도 귀향의 마음이 있었는데... 금선정을 중앙에 두고 솔숲이 좋잖아요. 아이들이 금선정에 와서 놀게 하고 싶었었지요.

현재 계획하시는 걸 소개해주시지요.

설월당 할배(설월당 전익희) 유적을 복원하고 싶습니다. 방산종택 복원 추진 계획을 세워서 종친에게 추진을 부탁했습니다. 정부에도 관련 건의서를 보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100세를 목표로 건강유지 일상 활동하기입니다. 매일 읽기, 쓰기, 그리기.. 매주 1회 야외 자전거 타기, 매월 달력 뒷면 활용 천자문 초서로 쓰기입니다. 현재도 습관으로 실천하고 있습니다.

                                                              황재천 프리랜서 기자

 

 

 

 

 

 

 

 

 

 

전준하 고문 프로필

- 영주동부국민학교, 영주중부국민학교 졸업,

- 영주중학교 졸업, 안동고등학교 졸업

- 갑종 간부 후보생으로 장교 임관

- 육군대학 수료

- 국방대학원 수료

- 의무행정 장교로 대령 예편

- (전)(고)박정희대통령정신문화선양회 초대 사무총장

- (전)전쟁기념관 관리사업소장

- (현)한국서화협회 초대작가

- (현)재경영주시향우회 고문

- (수상) 보국훈장 삼일장, 대통령 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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