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하면 ‘조선건국’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주로 ‘정치’ 이야기가 많지만 그 바탕에는 ‘경제’가 있다. ‘경제’란 ‘세상을 다스려 백성을 구제한다’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준말이다.

정도전은 불꽃 튀는 일정 중에서도 저술 작업을 통해 조선을 설계해 나가기 시작했다.

경세제민과 부국강병에 필요한 병학·의학·지리·산술·천문 등 여러 분야에 관심을 기울렸다.

이러한 정도전의 저술은 ‘민본주의에 기반하여 재상 중심의 권력구조 그리고 한당(漢唐)의 군현 제도와 군사제도를 절충했다’는 평가를 받는 등 한 사람이 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국가 경영의 모든 분야를 총망라했다.

정총(鄭摠, 1358∼1397)은 정도전이 지은 『경제문감』 서문에서 이렇게 적었다.

「경재문감」은 판삼사사(判三司事) 봉화백(奉化伯) 정공의 저술이다. “정공은 성군을 만나 재상의 지위에 올랐으니 불우한 때라고 말할 수도 없거니와, 도를 행하지 못하였다고도 말할 수 없는데, 무슨 저서를 쓴단 말인가”하기에,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공은 기필코 요순(堯舜)이 백성을 다스리던 것과 같이 하고야 말리라는 마음에서였으니, 요순의 도를 행함에 한 올이라도 다 하지 못한다면 그 가운데 실로 모자람이 있을 것이기에 그렇게 한 것이요, 이것이 공이 저술한 뜻이다.”하였다. 창룡(蒼龍) 을해(乙亥 태조4 1395) 9월 하한(下澣) 정총은 서문을 쓴다.

위는 새 왕조 창업에 대한 정도전의 꿈과 열정이 저술 작업을 통해 분출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대목이다.

정도전은 각종 유서(儒書)들을 참고하여 문물제도의 논거로 삼는데 필요한 교재를 직접 저술했다. 조선이 건국된 후 그가 변을 당하기까지 6여 년 동안 저술한 작업들은 정교하게 유교적 이상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강령과 구체적인 통치 교범으로 오래도록 지속될 조선 문명의 설계도를 완성했다.

정도전은 저서 보급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렸다. 아무리 훌륭한 책을 쓴다 해도 대량의 출판 체제가 되지 않으면 실효가 없기 때문이다. 고려가 금속 활자를 발명했다고 말하지만 당시의 인쇄와 출판에 금속 활자가 활용된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다움과 같이 말했다.

“선비가 아무리 학문에 마음이 있어도 서적을 구하지 못하면 또한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 동방은 서적이 적어 배우는 사람들이 모두 독서의 범위가 넓지 못함이 한스럽다. 나 또한 이 사실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 것이 오래다.

간단한 바람이었다면 ‘서적포’를 설치하고 동활자를 만들어 경(經)·사(史)·자(子)·서(書)·제가(諸家)·시(詩)·의(醫)·병(兵)·율(律)의 서적까지 모두 인쇄하여 학문의 뜻을 둔 사람들이 모두 그 서적을 구해 읽어 학문의 시기를 놓치는 없었으면 한다. 모쪼록 모두 사문(斯文, 유학의 도를 이르는 말)을 일으키는 일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아 이 일에 공감해 주기 바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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