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중 시인

총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온 나라가 선거 때문에 시끌벅적하다. 그도 그럴 것이 총선은 대통령 선거만큼이나 권력의 향방을 가늠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니 한 치의 양보도 있을 수 없는 것이 선거일 수밖에 없다. 다만 투표권을 가진 유권자로서 선거를 치르는 정당의 행태를 보면 너 나 할 것 없이 우려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다. 물론 각 당의 입장에서 욕을 먹고 싸우더라도 이겨야 하는 것이 선거니 멋지기만 할 수는 없는 게 선거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번 총선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극단적인 싸움이 선거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싸우는 목소리가 커야 유권자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가 있다. 전투적인 목소리일수록 영향력이 커 보이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언론의 주목을 받을 수 있다. 그러니 말은 점점 양극단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고 어느덧 국민도 양극단으로 몰릴 수밖에 없는 구조가 돼 가고 있다.

선거에 있어서 중간은 있을 수 없지만 양극단으로 가는 생각의 폐해는 클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들은 눈을 부릅뜨고 정치인들의 말을 잘 골라내야 한다. 출마자들이 유권자의 감정을 건드리는 말을 잘 골라낼 줄 알아야 한다. 극단적인 말에 휩쓸려서 그들의 감정적인 선동에 넘어가서도 안 된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더라도 선거의 영향력은 과정의 싸움보다 더 엄청나다. 선거가 끝나면 권력은 정치인의 소유가 되지만 결과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국민의 몫으로 돌아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학의 범주에서 비장미와 골계미는 양극단에 있다. 비장미는 비장한 아름다움으로 죽음 의식과 같이 주로 비장함에서 나타난다. 골계미는 글자 그대로 해학과 풍자에서 나타나는 아름다움이다. 웃음이 있는 장면에서 골계미가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비장함과 웃음은 양극단에 위치할 수밖에 없다.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는 사람을 보고 웃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있을 수가 없다.

“수만 전선(戰船)이 간 곳이 없고, 적벽강이 뒤끓어 붉게 되어 불빛이 난리가 아니냐. 가련할손 백만 군병은 날도 뛰도 못하고, 숨막히고 기막히고, 살도 맞고 창에도 질려, 앉아 죽고, 서서 죽고, 울다가 웃다 죽고, 밟혀 죽고, 맞아 죽고, 원통히 죽고, 불쌍히 죽고, 애써 죽고, 똥 싸 죽고, 가엾이 죽고, 성내어 죽고, 졸다 죽고, 진실로 죽고, 재담(才談)으로 죽고, 무단히 죽고,” 판소리 <적벽가> 적벽대전 장면의 일부로 군사들이 죽어가는 모습이다.

백만대군이 죽어가는 비장한 장면인데도 죽는 모습을 하나하나 따져 보면 웃음이 나온다. 판소리에서 슬픈 가락을 진양조, 빠른 가락을 자진모리, 휘모리라고 하는데, 슬픈 가락으로 시작하여 빠른 가락으로 병사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창을 할 때쯤이면 양극단에 있던 비장미와 골계미가 합쳐져서 묘한 아름다움을 나타내게 된다. 판소리에서는 양극단에 있는 비장미와 골계미를 통합하는 아름다움이 있다. 정말 놀라운 미적 감각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 정치도 이런 멋진 아름다움이 있을 수 없을까. 선거에 지면 모든 걸 잃어버릴 것처럼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선조들의 멋스러움을 떠올리는 것은 괜한 생각이 되는 것일까. 정치가 없이는 이 세상이 다스려질 수가 없으니, 정치를 떠나서 살 수도 없고, 옆에서 그냥 지켜보자니 마냥 답답하기만 하다. 잃으면 얻게 되고 얻으면 잃게 되는 이치는 삼척동자도 아는 뻔한 것인데도 선거판만은 이런 이치를 용인하지 않으니 참 애석하다.

선거판과 판소리는 ‘판’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판은 일이 일어난 자리 또는 어떤 일이 진행되는 분야를 말한다. 같은 판인데도 선거판과 판소리는 왜 이렇게 다른지 모르겠다. 구호와 선동이 넘치는 선거판에 비해 판소리에는 해학과 풍자가 넘친다. 선거판을 뛰는 사람들은 판소리에서 양극단을 통합한 정신의 아름다움을 동경해야 한다. 어떻게 우리 선조들은 이렇게 아주 다른 것을 조화롭게 통합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다름과 틀림의 차이를 미의식으로 승화시켰을까. 그 위대함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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